어릴 때부터 만화나 영화, 소설 등을 볼 때면, 왠지 모르게 주인공보다 악당들에게 더욱 매력을 느끼곤 했다. 단순히 주인공의 승리를 위해 소모되는 악당이 아니라, 주인공의 숙적으로서 끝까지 대립하며, 특유의 어두운 멋이 있는 악당들을 좋아했다.
내 머리 속에 있는 ‘멋진 악당’의 전형적인 모습은 어릴 때 시청한 몇몇 영화를 통해서 이미지가 구체화되었다. 이를테면, 영화 『스폰』의 주인공,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와 같이 어딘가 고독하고, 무거운 카리스마가 나를 매료시켰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긴 머리, 긴 망토를 하고, 음울하면서 거대한 성에서 고독하게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형상화됐다. 그러다보니, 당시 즐겨하던 블리자드 게임에서도 항상 어둠과 악을 상징하는 캐릭터 위주로 선택하곤 했다.(스타크래프트에선 저그, 디아블로에서는 네크로맨서, 워크래프트에선 언데드, 와우에서는 흑마법사…)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들었던 ‘린킨파크’를 기점으로, 나의 학창시절은 항상 락 음악과 함께였다. 지금이야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다음 카페를 중심으로 주요 커뮤니티들이 형성됐다.
주변에 락 음악을 듣는 친구가 많지 않아, 인터넷으로 락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카페를 찾게 되었고, ‘악숭’이라는 카페에 가입하게 됐다. 악숭은 ‘악마 숭배자’의 약어로서, 상당히 거친 락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카페였다. 바로 여기에서 ‘블랙 메탈’을 비롯한 각종 ‘익스트림 메탈’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나의 음악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게 됐다.
아마도 요즘엔 ‘메탈 장르’를 주로 듣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메탈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이전부터 들어왔던 사람들이지, 새롭게 듣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락/메탈의 시대가 저문 시대인 지금은 헤비 메탈 리스너가 더욱 드물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사람은 헤비 메탈이 시끄럽다는 이유로 잘 듣지 않는다. 그런데 헤비 메탈보다 더욱 시끄럽고 극단적인 장르가 있다. 익스트림 메탈(Extreme Metal)은 헤비 메탈보다 더욱 과격한 음악 장르이다. 말 그대로 ‘극단’의 음악을 표현한다.
익스트림 메탈은 크게 ‘데스 메탈’, ‘블랙 메탈’, ‘고딕 메탈’, ‘둠 메탈’ 등으로 구분된다. 익스트림 메탈은 주로 그로울링이나 스크리밍 같은 거친 보컬이 사용되며, 무겁고 어두운 주제를 노래한다.
- 데스 메탈(Death Metal): 주로 죽음과 폭력을 주제로 하여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패턴을 보인다.
- 고딕 메탈(Gothic Metal): 주로 슬픔과 우울을 주제로 하여 종종 소프라노 보컬을 도입하기도 한다. - 둠 메탈(Doom Metal): 주로 파멸과 절망을 주제로 하여 극도로 어둡고 음산하고 묵직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나는 이 중에서 ‘블랙 메탈(Black Metal)’이라는 장르에 큰 매력을 느끼고, 지금까지도 즐겨 듣고 있다. 이에 따라, 블랙 메탈이 어떤 장르인지 소개해보고, 주요 그룹과 그들의 음악을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블랙 메탈이라는 장르는 북유럽, 특히 노르웨이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평화로운 복지국가로 잘 알려진 나라에서 이러한 극단적인 음악 형태가 나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아마도, 북유럽 사람들의 먼 선조인 바이킹의 뜨거운 피, 차가운 기후, 복지국가 특유의 권태로운 사회 분위기 등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블랙 메탈은 Bathory의 『Under the Sign of the Black Mark』, Venom의 『Black Metal』에서 기본적인 장르의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이후, Mayhem, Burzum, Darkthrone이 정돈되지 않았던 블랙 메탈의 컨셉과 기법을 구체화함으로써 블랙 메탈이라는 장르가 형성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블랙 메탈의 일반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 비명을 지르며 찢어지는 듯한, 스크리밍 창법을 구사하는 보컬 - 한 음을 계속 연주하는 트레몰로 기법으로, 불경스럽고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기타 - 하이햇, 베이스 드럼, 스네어 드럼 등을 동시에 난타하는 블래스트 드러밍 - 신디사이저를 활용하여, 어둡고 음침하며 음산한 분위기 연출 - 사타니즘, 오컬티즘, 북유럽 신화, 자연 숭배, 자살, 극도의 슬픔 등을 주제로 한 가사 - 장엄한 대곡, 혹은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표방하여, 어둡고 차가운 멜로디 표현 - 일반적인 장르의 음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극도의 감정 표출 - 콥스 페인팅, 가죽 재킷, 징 박힌 갑옷, 무기 등의 컨셉 노출
블랙 메탈을 처음 들으면, 우선 지글지글한 노이즈와 뭉게지는 톤과 같은 조악한 사운드가 귀에 들어온다. 이렇게 시끄럽고 소음에 가까운 것을 도통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블랙 메탈 매니아’들은 블랙 메탈 특유의 지저분한 톤을 ‘로우(Raw)하다’라고 이야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악한 사운드가 블랙 메탈이 표현하고자 하는 ‘사악함’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로우함을 핑계로 정말 소음에 가까운, 구린 음악도 많이 존재하긴 하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로우함’이 블랙 메탈의 근본이다.
블랙 메탈이 지니는 근본적인 ‘로우함’은 블랙 메탈을 처음 들어보려는 사람들에게 진입장벽을 형성한다. 사실 블랙 메탈이라는 장르가 표현하는 형식이든, 주제든, 멜로디든, 어떤 면으로도 태생적으로 대중적일 수 없는 장르이다.
물론 블랙 메탈에서도 대중과 가까워지려는 시도가 일부 존재하긴 했다. Cradle of Filth, Dimmu Borgir가 제시한 ‘화려한 블랙 메탈’은 인기 차트에도 오르는 등 어느 정도 대중음악의 제도권 안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사용하기도 하고, 소프라노 보컬도 기용하면서 아름답고 화려한 블랙 메탈을 표현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블랙 메탈이 대중성을 지향할 수록 매니아들은 거부감을 느꼈고, 블랙 메탈의 컨셉 특성상 대중들조차 온전히 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블랙 메탈의 리스너들은 ‘블랙 메탈만의 근본’을 따지고, 엄격한 표현의 형식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따라서 ‘블랙 메탈의 대중화’는 일부 아티스트들만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일종의 실험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이 때, 최신 트렌드를 이끄는 블랙 메탈 아티스트인 Alcest나 Deafheaven은 블랙 메탈을 새롭게 해석해내는 방법으로, 굳이 대중성과 화려함을 쫓지 않고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음악적 성공을 거두었다.
북유럽에서 시작된 블랙 메탈은 ‘사악함’을 표현하는 음악 장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때의 사악함은 기독교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립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블랙 메탈의 태동을 알린 Mayhem, Burzum, Darkthrone은 북유럽의 오랜 전통인 바이킹 문화가 기독교 문화에 잠식되있음을 비판했다. 그들은 ‘사타니즘’, ‘오컬티즘’ 등의 이미지들을 전형적인 반기독교 문화의 상징으로서 활용했다. 즉, 초기의 블랙 메탈 아티스트들은 기독교 문화를 비판하기 위해 악마적 요소와 사탄 숭배 등의 요소를 사용한 것이다.
Burzum의 ‘Varg Vikernes’는 악마를 소재로 사용하는 것 조차 기독교 문화라고 간주하고, ‘북유럽 문화’를 음악적 요소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Varg는 기독교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노르웨이의 유명한 성당을 방화하고 자신의 음반에 라이터를 동봉해서 판매하기까지 했다. Varg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북유럽 신화, 자연 숭배, 바이킹의 폭력 등의 주제를 사용하며, 블랙 메탈의 외연이 점차 넓어지게 됐다.
블랙 메탈을 이끈 1~2세대의 혁신적인 움직임에 이어서, 후대의 블랙 메탈 아티스트들은 보다 다양한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외연을 확장하기보단, 방향을 완전히 틀어서 개인의 내면 세계 심연을 깊숙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신디사이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내면 세계를 음울하게 표현하거나, 고통스러운 우울함을 묘사하고, 죽음을 옹호하기도 했다.
블랙 메탈 선구자들의 장르적 실험이 성공적으로 이어지자, 블랙 메탈은 클래식, 앰비언트, 포크 등 다양한 장르와 결합되되었다. 의외로 블랙 메탈은 다양한 장르와 아주 잘 조화되는 듯이 보였다. 지금도 블랙 메탈은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 끝없이 연주되고 있다. 수명이 굉장히 짧을 것이라 생각됐던 블랙 메탈은 독자적으로 진화를 거듭하며 계속해서 발전해나가고 있다.
초보 리스너에겐 다 비슷하게 들리겠지만, 블랙 메탈 역시 여러 세부적인 하위 장르로 구분된다. 아래에 나열된 것 외에도 다양하게 구분할 수 있지만, 하나하나 모든 장르를 열거할 수 없기 때문에 대표적인 몇몇 장르만 나열한다.(장르의 구분이 모호한 경우도 있으므로, 대략적인 음악적 분위기를 파악하는 정도로만 참고하면 된다.)
1. 로우 블랙 메탈(Raw Black Metal)
블랙 메탈의 근본이다. 사실상 이 그룹들로부터 블랙 메탈과 관련된 모든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노이즈가 가득하고 음질이 조악한 특징이 있지만,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의 느낌을 준다. 다만, 처음 입문하려는 사람이 듣기엔 어려울 수 있으니, 그나마 듣기 편한 것들부터 들으면서 귀가 충분히 트였을 때 듣길 추천한다.
2. 심포닉 블랙 메탈(Symphonic Black Metal)
로우 블랙 메탈의 틀 위에 신디사이저를 적극 사용하면서, 웅장함과 화려함을 표현한 장르이다. 보통 블랙 메탈 장르의 입문은 심포닉 블랙 메탈 아티스트의 노래를 들으면서 시작한다. 본인도 Cradle of Filth와 Dimmu Borgir 노래를 들으면서 점차 로우 블랙 메탈에도 관심을 가졌다.
3. 앳모스피릭 블랙메탈(Atmosphere Black Metal)
다른 블랙 메탈 장르에 비해 템포가 비교적 느릿느릿하며, 음울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래에 소개하는 ‘디프레시브 블랙메탈’과 구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보통 특정 장르로 이야기되기보단, 음울한 분위기의 음악을 ‘앳모스피릭하다’라고 말한다.
4. 디프레시브 블랙메탈(Depressive Black Metal)
내면의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 처절함, 우울증, 자살, 죽음을 예찬한다. 블랙 메탈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극단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5. 아방가르드 블랙메탈(Avant-garde Black Metal)
한마디로 표현되기 어려운, 난해하고 복잡한 형식의 음악을 시도한다. 블랙 메탈을 충분히 들은 사람들도 한 번 듣는 것만으로는 잘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만큼 귀에 익숙해진다면 다른 장르보다도 ‘듣는 즐거움’이 더욱 클 수 있다.
6. 포스트 블랙메탈(Post-Black Metal)
다양한 장르와 결합하여,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장르를 제시한다. 이를테면, 슈게이징과 결합한 '블랙게이즈(Blackgaze)', 복잡한 구성을 보여주는 '프로그레시브 블랙 메탈(Progressive Black Metal)' 등 블랙 메탈의 한계를 계속해서 넓혀가고 있다.
블랙 메탈까지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다면, 거의 모든 음악 장르를 편견 없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블랙 메탈은 극단적이고 일체의 타협이 없는 음악 장르이다.
아마도 어디 가서 “나 블랙 메탈 듣는다.”라고 하면서 이어폰을 건네주면, 열에 아홉은 미친놈 취급을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블랙 메탈만이 지니는 매력과 아름다움, 처연함이 있다. 이 장르에 한 번 빠지게 된다면, 이 음악들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블랙 메탈 명반들을 나열하면서 블랙 메탈 장르에 관한 소개글을 마무리한다.
Mayhem - 『De Mysteriis Dom Sathanas』 Darkthrone - 『A Blaze in the Northern Sky』 Darkthrone - 『Transilvanian Hunger』 Burzum - 『Hvis lyset tar oss』 Burzum - 『Filosofem』
Emperor - 『In the Nightside Eclipse』 Emperor - 『Anthems To The Welkin At Dusk』 Dissection - 『Storm of the Light's Bane』 Cradle of Filth - 『Dusk and Her Embrace』 Cradle of Filth - 『Cruelty and the Beast』
Dimmu Borgir - 『Enthrone Darkness Triumphant』 Alcest - 『Souvenirs d'un autre Monde』 Alcest - 『Écailles de lune』 Limbonic Art - 『Moon in the Scorpio』 Anorexia Nervosa - 『Drudenhaus』 Batushka - 『Litourgiya』
Shining - 『Within Deep Dark Chambers』 Shining - 『V - Halmstad』 Anaal Nathrakh - 『Vanitas』 Mgła - 『Exercises in futility』 Behexen - 『By the Blessing of Satan』 Deathspell Omega - 『FAS - Ite, Maledicti, in ignem Aeternum』
Inquisition - 『Ominous Doctrines of the Perpetual Mystical Macrocosm』 Cult of Fire - 『Ascetic Meditation Of Death』 Marduk - 『Those of the Unlight』 Gehenna - 『First Spell』 Nocternity - 『Onyx』 Bathory - 『Under the Sign of the Black Mark』 Summoning - 『Stronghold』 Solefald - 『The Linear Scaffold』 Fanisk - 『Noontide』 Ne Obliviscaris - 『Portal Of I』
Graveworm - 『As the Angels Reach the Beauty』 Bathory - 『Blood Fire Death』 Gorgoroth - 『Pentagram』 Darkspace - 『Darkspace I』 Bethlehem - 『Dictius Te Necare』 Immortal - 『Pure Holocaust』 Sad Legend - 『Sad Legend』 In The Woods... - 『HEart Of The Ages』 Lifelover - 『Konkurs』 Beherit - 『Drawing Down the M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