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불교가 던지는 화두와 내면을 탐구하는 평온함에 매력을 느끼고, 점점 불교에 더욱 심취하고 있다. 최근에는 불교를 연구한 2차 서적들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숫타니파타』나 『니까야』같은 초기 경전까지도 읽어보고 있다.
문득, 당시 시대 상황을 포함하여,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색체를 빼낸, 오롯이 실존을 추구한 한 인간의 생애가 궁금해졌다. 이에 따라, 법륜 스님이 저술한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을 구매하여 읽어보았다.
"왜 어떤 이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고통스럽게 농사를 지으면서도 못 먹고 헐벗어야 하고, 왜 어떤 이는 편안히 놀고먹을 수 있는 것일까? 왜 세상은 이다지도 불공평한가? 다 함께 행복해지는 세상은 없는 것일까?"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의 인생은 그야말로 완전하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 같다. 고타마는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희로애락을 짧은 인생에 체험하고,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실천철학자이다. 이 책은 그러한 고타마의 자비로운 삶에 대해서 일반 대중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편한 문체로 서술하고 있다.
다만, 부처의 수행 과정에 대해선 상세하게 나와있지만, 깨달음 이후의 행적에 대해선 매우 간략하게 나와있어 아쉬웠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갈증이 들어서, 이중표 교수가 저술한 『붓다 연대기』도 구매해보았다. 하지만, 불교 사상과 고타마 싯다르타의 일생을 이제 막 알아보려는 입문자에게는 『인간 붓다』가 가장 적절한 선택일 것이다.
신화의 세계에서 인간의 역사로
당시 인도는 전제군주제인 16개 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중 '코살라 국'이 가장 세력이 컸다. 부처가 태어난 '카필라바스투'는 코살라 국의 영향 하에 있는 농업 중심의 공화제 소국가였다. 카필라바스투의 '석가족'은 종족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여, 소국이지만 주변 강대국이 함부로 하지 않았다.
'슈도다나 왕'과 그의 아내 '마야 부인'은 결혼한 뒤 자식을 무척 기다려왔다. 어느 날, 마야 부인은 축제를 마치고 잠이 들었는데, 흰 코끼리가 오른쪽 갈비뼈로 들어오는 태몽을 꿨다. 슈도다나 왕은 64명의 수행자에게 해몽을 부탁했고, 곧 왕자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해몽에 따르면,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를 하면 '부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위대한 인간의 탄생과 성장
당시 인도는 친정에서 출산하는 풍습이 있어서, 마야 부인은 친정인 '데바다하'로 향했다. 왕비는 데바다하로 가는 중, 아소카 나무가 우거진 '룸비니 동산'에서 출산하게 되었다. 싯다르타는 탄생하자마자 스스로 일곱 걸음을 걷고, 오른손으로 위, 왼손으로 아래를 가르치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이는 생명은 누구에게도 훼손당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닌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불행하게도, 싯다르타가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인 마야 부인을 잃게 되었다. 슈도다나 왕은 싯다르타가 여덟 살이 되자, '비슈바미트라', '크샨티데바'를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싯다르타는 스승으로부터 각종 언어와 문학, 논리학 등을 배웠고, 훗날 이 때의 가르침은 중생을 교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슈도다나 왕은 싯다르타가 무왕의 자질을 갖추도록 각종 병기, 무술, 병법 등을 배우게 했다.
싯다르타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성인식을 치르고 입태자식을 거행하였다. 화려한 농경제를 통해 왕자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려고 했지만, 싯다르타는 늙고 괴로워하는 농부의 모습을 발견했다. 싯다르타가 농부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어보니, 세금을 내기 위해 고생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충격을 받았다.
행복하고 화려해보이는 왕과 대신들의 모습을 보고, 싯다르타는 인간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의문이 쏟아져나왔다. 지금까지 배웠던 내용을 통해서는 고통의 해결방법을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잠부나무' 아래에서 고통의 원인을 찾고자 명상을 했고, 이를 바라보는 슈도다나 왕은 출가의 불안함을 느꼈다.
변해버린 태자의 모습을 보고, 다시 세상일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성적 쾌락에 빠트리기로 했다. 싯다르타는 고통의 원인에 대한 뾰족한 해결방법을 찾기 못한 채 방황했고, 세속적인 쾌락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세속적인 쾌락으로는 도저히 잊혀지지 않았고, 점차 눈은 수심이 가득차게 되었다. 대신들은 태자가 출가할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빨리 결혼시킬 것을 왕에게 건의했다.
열일곱에 맞이한 첫 번째 태자비는 '고피카'로 매우 아름다웠지만 수 년간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둘째 부인인 '야소다라'에게도 자식이 없자, 세 번째 부인까지 맞이하였다. 왕이 간택한 고피카와는 달리, 야소다라는 무술대회를 개최하고, 이 대회의 참가자인 싯다르타를 남편으로 맞이했다. 그 동안 태자는 브라만의 수행법을 익혀, 명상이나 요가 등 수행을 계속해나갔으나, 여전히 번민으로 갈등했다.
위대한 출가, 왕궁을 떠나 중생 속으로
태자는 성의 동쪽 문에서 노인, 남쪽 문에서 병자, 서쪽 문에서 시체를 발견하고, 마부 '찬다카'와 이야기를 나눴다. 참혹한 모습을 통해 생로병사의 고통과 가난한 이들, 노예들의 비참한 현실을 몸소 접하게 되었다. 거리에서 버려진 사람들의 고통 위에서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이 유지되었다고 생각하며 한탄했다. 얼마 뒤, 썩어갈 자신의 육신을 생각하니, 사치와 향락으로 허송세월한 것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당시 인도에는 계급제도를 옹호하는 '브라만교'에 반하는 사상을 추구하며 수행하는 '사문'이 번성했다. 성 밖에서 만난 사문의 모습에서 자신의 고민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게 되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점차 전환하려했다.
슈도다나왕은 싯다르타가 사문과 자주 만나는 모습을 보고, 권력의 맛을 보면 세속일에 애착을 가질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따라, 태자에게 '카필라바스투' 영토를 다스리도록 지시했고, 싯다르타는 왕명을 받아 선정을 베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선정을 베푼다하더라도,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현실 자체에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느꼈다.
태자가 슈도다나 왕에게 출가를 요청하자, 왕은 태자의 손을 붙잡고 슬피 울며 거절했다. 태자는 출가하지 않는 조건으로 '늙지 않는 것', '병들지 않는 것', '죽지 않는 것', '이별하지 않는 것'을 제시했다. 왕은 싯다르타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후사를 낳아달라고 청했다.
시간이 흘러, 스물 아홉이 된 싯다르타는 아들이 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착잡해졌다. 막 출가를 단행하려 했는데 새로운 장애가 생겼다는 생각에, 아들의 이름을 '라훌라(장애)'라고 지었다. 싯다르타는 후손을 남겨 대가 끊길 염려가 없어졌고, 야소다라도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들이 출생한 기념으로 성 안에서는 크게 잔치를 하였고, 밤이 늦어 모두가 지쳐 잠이 들었다. 싯다르타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한 번 바라보고, 성곽을 넘어 출가하였다. 마부 찬다카는 끝까지 싯다르타의 출가를 막으려했으나, 몸에 걸친 것들을 주면서, 왕에게 심사숙고의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고타마는 출가만 하면 곧바로 중생 구제의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숲 속에서 혼자 수행했다. 며칠이 지나고, 집에서 먹던 진수성찬과 편안한 궁중생활이 그리워졌으나, 고통받는 중생을 떠올리고 유혹을 뿌리쳤다.
일주일 후, 전에 보았던 사문들의 모습을 보고 흉내내보았지만 한계를 느낀 뒤, 스승을 찾아나섰다. 먼저 '바이샬리 숲'에서 수행하는 고행주의자 '바르가바'에게 찾아가 가르침을 듣고자 했다. 바르가바는 현생의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후세에 더 큰 즐거움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르가바의 고행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함이 아니라, 고행 그 자체를 위한 고행이라고 파악한 뒤, 떠났다.
싯다르타는 16세에 출가하여, 104년 동안 수행한 뒤, 300여명의 제자를 거느리는 '알라라 칼라마'를 찾아나섰다. 그는 120세가 되도록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스스로 안타깝게 여기고, 고타마에게 자신의 사상을 알려주었다. 알라라 칼라마의 가르침으로 고타마는 '아무 것도 없는 경지(무소유처의 선정삼매)'를 깨닫고 증득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 역시 궁극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고 여기고 떠났다.
이후, 7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는 '웃다카 라마풋타'를 찾아갔다.
그의 가르침으로 '비상비 비상처'의 선정삼매를 깨달았으나, 이 역시도 만족하지 못하고 떠났다.
'무소유처'와 '비상비 비상처'의 경지는 수행자 자신은 평안을 얻을 수 있으나, 이는 홀로 고통 속에서 떠나있는 것이다. 현실을 떠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희열을 느끼는 '선정주의'는 진정한 해결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때, 웃다카 라마풋타의 제자 중 '다섯 명의 수행자'가 고마타에게 깊은 인상을 받고, 이후 고행을 함께 하게 됐다.
고행과 성도
고타마는 '우루벨라 숲'으로 가서, 누구도 할 수 없는 극심한 고행에 들어갔다. 재물욕, 명예욕과 더불어 성욕, 식욕, 수면욕조차 버리며 스스로의 육체를 괴롭혔다. 사람 해골에 비닐을 한 겹 입혀놓은 상태에 이르도록 고행을 했으나, 눈만은 별처럼 빛났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으면 곧바로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상태까지 갔으나, 물러서지 않고 수행을 지속했다. 고행 중, '마왕 파파야스'가 수행을 멈추라고 유혹했으나, 흔들리지 않고 단호한 결심을 했다.
6년 동안 죽음 직전까지 극심한 고행을 하고, 더 이상의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길을 차분히 관조하면서, 쾌락적인 궁중의 삶과 현실도피적인 선정주의, 끝없는 고행주의를 비판했다. 수행 방법에만 얽매이는 것은 본말이 전도되어,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데에는 무관심해짐을 깨달았다.
출가 수행의 본래 목적을 상기하면서, 처음 농경제 때 '잠부나무' 아래의 선정이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농경제의 참상으로 현실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관하게 되어, 중생을 구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고행을 마치고 '나이란자나 강'에서 목욕을 하며, 이전의 잘못된 수행을 물에 씻어버리고자 했다.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소녀 '수자타'가 기력이 쇠한 고타마에게 우유죽을 공양했다. 기력을 되찾은 고타마는 '핍팔라 나무'의 넓은 그늘 아래 평평한 바위를 수행처로 삼았다. 목동에게 부드러운 풀을 얻어, 바위 위에 정성껏 깔고, 이를 '길상초'라고 부르며 수행을 재개했다.
이 때, 고타마를 쫓아다니던 '다섯 명의 수행자'는 이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하여 비난했다.
고타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동쪽을 향해 가부좌를 하며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기 전까지 가부좌를 풀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수행이 깊어지면서, 20년 동안 쌓여온 업장과 내면의 갈등, 번뇌가 차츰 소멸되어갔다.
마왕과 그의 자식들이 고타마의 욕구를 자극했으나, 중생에 대한 자비와 십바라밀로 극복했다.
결국 마군에게 항복을 받고 아래의 4단계의 선정에 들었다.
1) 명쾌하게 선악을 분별하고, 악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였다.
2) 모든 선악의 분별마저 떠나고, 진리에 다가간 기쁨을 만끽하였다.
3) 육체와 정신의 강박관념을 소멸하여, 최고의 안락을 느꼈다.
4) 선과 악, 육체와 정신 그 자체가 상호의존하며, 구속 받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다가왔다.
고타마는 모든 중생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체험하고, 고통의 원인을 냉철하게 관찰했다.
스스로 존귀한 존재임을 망각한 채, 노예의 삶을 본래의 삶이라 착각하는 '무명'을 파악했다.
모든 생명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며, 한 몸이 되는 '불국정토의 세계'를 관조했다.
그리고, 진리의 세계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 자체가 진리임을 깨달았다.
전도의 개시
부처가 된 고타마는 깨달음의 순간을 정리하기 위해 계속 명상하며, 연기의 원리를 열두 단계로 정리하고 구조를 정립했다. 수행의 목적을 상기하고, 중생의 현실을 다시금 절박하게 자각하여, 주요한 교화 대상과 가르침들을 정리했다.
북인도로부터 온 장사꾼 '타푸사', '발리카'에게 보리가루, 우유, 물, 경단을 공양받고 기력을 회복했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보리수 나무 맞은 편에서 죽어가던 '라사야 부인'이 자신의 분소의를 부처에게 주었다. 부처는 라사야 부인의 분소의를 깨끗하게 씻어서 갖춰입고, 길을 나섰다.
'순타사티라 마을'에서 걸식하는 브라만 '우파카'를 만나고, 우파카로부터 스승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다. 자신에게는 스승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부처의 모습을 보고, 우파카는 부처를 피해 동쪽으로 내려갔다.
'녹야원'에 이른 부처는 '다섯 수행자'를 만났지만, 이들은 고타마가 고행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타락했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부처를 보고 인사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부처의 위의를 보고 감복하여, 자발적으로 스승의 예를 갖추었다.
부처는 다섯 수행자가 자신에게 크게 실망했다는 것을 알고, 섯불리 그들을 설복시킬 논리를 펴지 않았다. 같은 자리에서 함께 선정에 들면서 그들은 점차 마음의 문을 열었고, 새벽이 밝아올 즈음 '카운디냐'가 담론 끝에 깨달음을 얻았다. 이후 나머지 네 수행자를 위해, 각각의 근기에 맞추어 가르침을 설했고, 곧 모두 깨달음을 얻어 최초의 승가가 형성됬다.
이후, 부처와 유사한 삶을 살았던 부호 '야사'를 만났다. 부처는 번뇌하던 야사에게 진리를 설법하여 즉시 교화시켰다. 야사의 아버지 '구리'는 슬퍼하며 아들을 찾아왔다.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 생각난 부처는 설법을 통해 야사의 모든 가족을 교화시킨 뒤 신자로 삼았다.
야사의 가족 이야기를 듣고, 야사의 친구를 포함한 50명의 청년이 출가하여, 계를 받아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 부처는 처음으로 형성된 교단의 제자들을 모아놓고, 모두가 해탈했다고 선언한 뒤, 전도를 떠날 것을 당부했다.
자비와 지혜의 가르침, 교화 사례
부처는 정각을 이룬 뒤에도 가사 한 벌과 발우 하나 만을 가지고, 맨발로 북인도 전역을 돌면서 중생의 고통을 함께 했다. 60명의 제자를 전도의 길로 떠나보낸 후, '우루벨라'를 향하던 중, 유녀를 찾아 헤매는 청년들을 보았다. 청년들이 유녀가 자신의 재물을 훔쳤다고 하자, 부처는 달아난 여자보다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깨워주었다.
우루벨라에 도착한 뒤, 명성이 높았던 '카샤파 3형제'를 오랜 시간 동안 위의와 설법으로 교화하여 제자로 받아들였다. 부처의 소문을 들은 '빔비사라 왕'은 라자그리하 부근 숲에 있던 부처를 찾아갔다. 빔비사라 왕은 부처의 설법을 듣고 감화되어, 부처의 승단을 위해 사원을 지어서 기증했다. 이후에도 브라만 출신이었던 '사리푸트라', '목갈라나' 존자가 귀의하며, 1,250명의 비구 대중이 형성되었다.
기반을 잡은 부처는 석가족을 교화하고자 '카필라바스'로 향했다. 성대한 잔치를 준비해놓은 슈도다나 왕은 부처가 걸식을 한다고 하자, 불같이 노하고 부처에게 달려왔다. 하지만 슈도다나 왕은 부처로부터 교화받고 엎드려 예배했으며, 이 후에 수 많은 석가족들을 교화했다.
교세는 급속히 확대되어 갔지만, 이교도들과 격렬한 대립을 하기도 하고, 모략과 음모로 모함을 받기도 했다. 외도의 공격이 크면 클수록 이를 이겨내는 부처의 위력이 더욱 깊숙이 대중 속에 뿌리를 내렸다.
부처는 사람에 따라 다른 상태를 진단하여 가르침을 주었고, 신분을 막논하고 모든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다. 똥통을 나르는 '니다이', 살인마 '앙굴리말라', 바보 '출라판타카' 등 모든 중생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위대한 열반, 새로운 역사
부처는 45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중생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제자들과 함께 북쪽으로 떠나, '바이샬리'에 도달했다.
부처를 간호하던 '아난다'는 부처의 고통을 보며 가슴이 아팠고, 지도자를 잃은 다음이 걱정되었다. 아난다가 누가 승단을 지도해야되는지 묻자, 부처는 승가가 나한테 속해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며 꾸짖었다. 이는 종교 지도자를 계승하기보다, 수행자들이 스스로 더욱 절실하게 수행하나가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부처는 3개월 뒤에 열반에 들 것이라고 선언하며, 바이샬리를 떠나 최후까지도 설법을 이어나갔다. '파바 성'에 살고 있는 대장장이의 아들 '춘다'는 부처가 온다는 말에 공양을 준비했다. 춘다의 공양을 먹고, 부처는 식중독에 걸려서 지병이 악화되어 하혈을 하게 됐다. 혹여나 사람들이 춘다를 원망할 까봐, 공양의 공덕에 대해 설하며 춘다에 대한 원망이 잘못된 것임을 일깨웠다.
아난다와 여러 대중들을 데리고 '쿠시나가라'에 도착한 뒤, 사라나무 숲에 누으며, 오늘 밤 열반에 들 것이라 했다. 제자들은 누구를 따르고, 어디에 공양을 올려야 하는지 슬퍼하며 물어봤다.
부처는 "여래의 육신은 떠나지만, 진리의 법신은 영원히 그대들과 함께 할 것이다."라고 설했다.
아난다가 부처의 장례에 대해서 여러번 재차 묻자, 결국 '전륜성왕'과 같이 하라고 이야기했다.(몸을 깨끗한 새 천으로 싼 다음, 잘 타는 솜으로 마무리 한 뒤, 금으로 된 관에 넣어 향나무로 화장하는 장례)
부처는 가능한 많은 사람과 만나기 위해 숲 속에서 자리를 잡고, 마지막 예배를 시작했다. 120세의 브라만 '수바드라'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부처를 찾아왔고, 팔정도를 알려주며,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였다.
승가와 수행의 유지를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오직 계와 율을 스승으로 삼아 정진하라."라고 강조했다. 마지막 생명에 꺼져가는 순간에도 의혹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며, 제자들에게 재촉했다. 그리고, "낙숫물이 떨어져 돌에 구멍을 뚫듯이, 끊임없이 정진하라."라는 최후의 설법을 남기고 부처는 입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