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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빅 맨스필드의 『불교와 양자역학』

 


    모든 동서양의 철학 사상 중에서 '불교'를 가장 좋아한다. 절대적인 초월자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 인식과 진리 직관으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관점이 좋았기 때문이다.

    불교는 개인의 수양뿐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인식론, 우주관과 같은 넓고 복잡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가 현대 물리학인 '양자역학'과 연관된 부분이 있다는 점을 인식한 일부 사람들이 관련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특히, 티베트 불교의 종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도 현대 물리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연구 성과를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양자역학과 불교의 접점과 연구 방향 등도 함께 설명하고 있다.


    "나는 과학과 불교에 입문하기 위한 지식을 간단히 개괄함으로써 이 책을 시작했다. 우리는 이들 사이의 유사점들과 차이점들에 대한 인식의 범위 안에서만 과학과 불교가 어떻게 상호 작용해야 하고, 상호 간의 대화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언급할 수 있다."
      
    양자역학을 완벽히 이해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실제로도 상당히 어려운 물리학 이론이다.   
    일단 책 내용을 개괄적으로 정리하고, 추후에 내가 이해한 양자역학적 지식을 다시 작성한 다음에 이 서평과 연결하고자 한다.

    불교와 과학은 무엇인가?

      
    과학에서의 최종적인 심판은 항상 실험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과학은 쉽게 국경을 넘어 확산될 수 있다. 불교는 가장 큰 권위를 경험 - 추론 - 불경 순으로 부여하며, 경험을 통해 언어의 범주를 초월한 지식에 진리의 토대를 둔다. 아무리 뛰어난 스승이 있더라도, 제자는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서만 청명하고 미묘한 마음을 경험할 수 있다. 즉, 실험을 통한 경험적 검증을 필요로 하는 과학과 불교의 태도에 유사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은 객관적인 자연현상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불교도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불교는 내면의 주관적 영역에 초점을 맞추지만, 객관세계의 참된 본성을 이해함으로써 괴로움을 없애고자 한다. 따라서 불교도는 물리적 세계의 근본적인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과 조화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감정을 최대한 배제함으로써 자연법칙을 공식화하는 객관성을 기를 것을 강조한다. 불교는 긍정적인 감정을 계발하고, 위태로운 형식의 경험들을 순회하는데 전념할 것을 강조한다. 과학은 초연하고 냉정하게, 개인적인 호불호와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초연한 관찰자'의 이상에 접근하고자 한다. 불교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대자대비의 이념을 닦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밀접한 정서적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불교는 다양한 정신 상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연구는 과학과 지식에 자극을 줄 수 있다. 현대 물리학이 얽매여 있는 '뉴턴주의 세계관'을 불교철학의 '공'을 이해함으로써 명료화할 수 있다. 현대 과학은 지구에게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보살이 서원을 세우는 것처럼 과학과 대화와 협력을 나눠야 한다.

    양자역학과 자비


    '열 개의 구슬'을 상자 속에 넣고 힘차게 흔들면, 각 구슬들의 위치 변경을 식별할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는 '두 개의 전자'를 상자에 넣어놓으면, 구슬과는 달리 명확한 궤적을 식별할 수 없다. 서로 다른 물리적 특성을 지닌 두 전자는 식별가능한 변화를 보이지 않고, 측정할 수 있는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양자 입자들은 어떤 식으로 측정해도 측정가능한 결과를 갖지 않아서 차이를 식별해낼 수 없다.
      
    양자역학의 전형적인 상태는 자기본성 없이 지속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본질 없이 지속적으로 발전한다. 불교에서는 각 개체는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고유한 자성이 없다고 설명한다.
      
    '양자의 무차별성'은 물질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 중 하나로, 어떤 입자에도 개별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울리의 배타 원리'는 동일한 시스템 속의 두 전자는 동일한 양자상태를 가질 수 없다고 설명한다. 입자로 된 거시적인 시스템에서는 대부분의 양자효과가 사라지지만, 양자 시스템에서의 입자들은 분별불가능하다.
      
    불교의 핵심인 '보편적 자비'는 모든 중생의 복리를 기원하는 진실한 소망이자 의지이다. 에고와 에고의 욕망에 대한 끝없는 관심이 우리의 행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방해물이다. 자아동일성, 아집, 에고에 대한 그릇된 신념은 자기애착을 낳아서 타인의 사랑으로 바꾸기 어려워진다. 마음집중, 성성함을 유지하는 수행을 통해 다른 사람의 관점을 취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자아를 교환할 수 있다. 다른 사람과 자아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람이 괴로움을 벗어나기를 갈망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과 다른 사람의 개인차를 넘어서, 모든 존재는 근본적으로 무차별성을 지님을 인식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갈망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에 '무차별성'은 보편적 원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해탈에 대한 동등한 권리는 곧 인류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한 물질적 도움이라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

    중관사상의 공에 대한 개설

      
    양자역학에 따르면 물체들은 시공간의 제한된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비국소성'을 가진다. 이 때, 불교의 중관사상 중 '공'이라는 관점이 양자역학의 비국소성과 깊이 일치하고 있다.
      
    중관사상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불변의 본성을 지닌다고 보는 두 극단의 관점을 철저히 부정한다. 모든 모순의 대립을 초월하여, '공의 이치'에 완전히 동화하는 것이 윤희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 공과의 완전한 동화는 '무명'에 뒤덮인 자기중심적 개인에서 자비의 화신인 붓다로 변화시키게 된다.
      
    사무실 밖 마당에 기둥을 세워놓으면, 기둥은 모든 사물이 그렇듯이 실체적이고 실재적인 것처럼 보인다. 즉, 기둥은 외부의 다른 사물과 관계 없이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관사상에 따르면, 기둥은 외부의 셀 수 없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의지하므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기둥은 목재와 목재의 형태, 색깔, 콘크리트 기초, 장소와 같은 부분들의 전체에 의지하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기둥의 존재는 우리의 앎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데, 상상과 개념적 명칭 속에서 '기둥'이라는 것을 구상하는 것이다. 마음은 다양한 지각의 파편들과 기억, 연상, 예상들을 모아서 하나로 만든 대상에 '기둥'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즉, 우리의 마음은 무의식적으로 대상들에게 독립적, 본래적 존재라는 거짓 특성을 부여하여 그 대상을 과대평가한다.
      
    만약 기둥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의 본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 또한 없으므로 변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두가 습관적으로 실재의 토대라고 믿고 있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모순된 생각이다.
      
    불교의 공은 대상과 주관의 모든 차원에 적용되기 때문에 본래적 존재는 비어있다고 파악한다. 모든 것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주관과 자아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잘못된 신념을 버릴 수 있다.
      
    기둥은 본래적 존재의 공으로서, 독립적 존재가 없고, 자족적인 본질도 없다. 기둥은 무한한 관계들의 그물망과 상호작용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기둥이라고 하는 독립적인 존재가 없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그 기둥을 기등으로서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둥이 본래적으로 존재했으면, 주변과 연결되지 못하고 그 자체 영속성으로 굳어지게 된다.

    공은 순수한 부정으로, 모든 현상의 본성이 의존적이며, 현상들에게는 본래적 존재가 비어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모든 사물은 의존적이며, 원인과 조건, 전체와 부분, 정신적인 명칭에 의존하고 있다. 모든 주관과 대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래적인 존재의 속성'이라는 거짓된 속성은 주관과 대상에 근거 없이 투사된 것이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는 모든 것이 깨어있는 경험처럼 독립적, 본래적으로 실재하는 듯이 느껴진다. 마음은 꿈 속의 다양한 대상들과 주관들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자기존재를 투사한다. 깨어있는 마음도 자아의식과 이를 둘러싼 주관과 객관의 대상들 속에 독립적 존재를 투사한다. 무의식적으로 주관과 대상에게 실재성을 부여하는 기만적인 투사에서 고통의 근원인 집착이 일어난다.
      
    독립적 존재의 투사가 이루어지면, 모든 것이 공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상에 대해 과대평가한다. 실재에 대한 깊은 지식을 지니게 되면, 개인적인 경험은 보편화되고, 공성은 자비를 일으키게 된다.
      
    자아가 영원하지 않고 쇠퇴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영원한 독립적 자아에 집착하는 순간 고통이 이어진다. 자아를 내려놓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자아라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면 많은 고통이 일어난다. 지속적인 행복은 자아의 감옥을 깨부수고 진정으로 타인의 안녕을 염려할 때만 성취될 수 있다.

    평화의 물리학

      
    뉴턴은 우주를 독립적이고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들로 구성되어, 복잡한 구조물을 형성한다고 생각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한 물체의 존재는 그것이 맺고 있는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 의존한다. '상보성 원리'는 사물의 여러 면은 동등하게 실재하지만, 결코 동시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상호 배타적이라고 간주한다. '전자'는 관측 여부에 따라 입자와 파동으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입자성과 파동성은 동시에 볼 수 없다. 전자의 입자성을 실험할 때는 파동성을 연구할 수 없으므로, 상호 배타적인 실험 장치의 배치가 요구된다.
      
    EPR에 따르면, 상호 관련된 입자는 각각 파동과 입자의 상보적 성질을 가진다. 물리량의 값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방해하지 않으면, 물리량에 상응하는 물리적 실재의 존재가 드러난다. 두 입자 사이에 어떠한 방해가 없다면, 각 입자는 상호 관계가 있으므로 반대편의 입자를 정확히 측정하고 예측할 수 있다. 두 입자는 상호 관련이 있으므로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지니지만, 상보성의 원리와 어긋난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EPR은 양자역학이 실재에 대한 완전하 설명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완전하다고 지적한다. '보어'에 따르면, 이러한 모순은 실험장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양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양자의 속성에 따르면, 각 속성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 장치의 구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즉,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EPR의 주장은 '숨은 변수 이론'을 연구하도록 많은 사람을 부추겼다.
      
    '벨'은 양자역학의 특성이 '숨겨진 변수'에서 나온다는 EPR의 입장을 부등식을 제시하여 다시 공식화했다. '벨의 부등식'은 많은 연구실에서 실험된 끝에 위반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그 결과 '숨겨진 변수 가설'의 가능성이 제거됐다.
      
    자연은 일정한 시간과 공간 영역 안에 어떤 시스템을 국한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비국소성'을 지닌다. 잘 고안된 자연의 물리적 시스템은 그것들의 구성요소 사이에서 동시적인 상호연결과 관계를 보여준다. 각 구성요소는 떨어져 있어서 어떤 정보나 에너지 교환 없이도 동시적으로 동작하고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14세기 중관사상의 대가인 '총카빠'의 사례로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있다.
    어느 날 종을 파는 상인이 총카빠의 사원을 장식할 의식용 종을 가져왔다. 종소리는 황홀했으나, 가격이 너무 싸서 의심이 들었고, 일부 종이 조악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 구체적으로 확인하려했다. 종을 가려내기 위해 눈으로 '예술적 가치'를 보고, 청동 함유량을 분석하기 위해 '용해'하고, 강도를 측정하기 위해 '힘'을 가했다. 예술적 가치, 용해, 힘은 동시에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 파악되는 것이기 때문에 상호 배타적인 속성을 지닌다. 각 실험은 상호 배타적인 과정을 요구하므로, 이를 양자역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보적 속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청동 함유량을 알고 있더라도 완전히 정확하고 명확한 강도를 알 수 없다. 청동 함유량의 측정은 특정한 측정 상황 속에서 오직 상보적 속성 가운데 하나인 '청동 함유량'만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때, 다른 속성들(예술적 가치, 강도)는 청동 함유량을 측정할 때는 동시에 특정될 수 없다.
      
    총카빠의 실험은 '상호 배타적 본성'으로 인해 종의 모든 면을 동시에 파악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서 가로막았다. 종 장사꾼은 멀리 떨어진 방에서 무작위로 예술적 형태, 청동 함유량, 강도를 실험할 것을 제안했다. 무작위로 진행되는 실험을 모두 통과하지 않으면 탈락하며, 각 방은 서로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고 독립적이다. 각 방의 실험이 같은 것일 경우, 각 종은 항상 동일한 형태, 청동 함유량, 강도를 지닌다는 것을 발견했다. '국소성의 원리'에 따라 각 종을 격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던 것이다.
      
    벨 부등식에 따르면, 각 방의 실험이 각자 다른 경우, 최소한 세 번 중 한 번은 같은 결과를 산출한다. 총카빠의 측정에 따르면, 네 번에 한 번 같은 결과를 기록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벨 부등식과 총카빠의 실험 결과가 차이나는 것은 국소성과 상호 독립적 존재 중 틀린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전적인 관점에 따르면, 빛을 초월하여, 빛의 속도보다 빨리 통신하는 독립적인 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양자역학의 비국소성은 물체에 대한 생각을 전적으로 교정하여, 자연에 대한 왜곡된 투사를 제거할 것을 요청했다. 물체는 명확하게 시공간의 영역 속에 자리잡고 있는 독립적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 생각될 수 없다. 상호 관계의 입자 간 연결은 일상적이고 거시적인 감각작용으로 정제된 고전 물리학의 관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자연은 우리가 어렴풋이 이해할 수 밖에 없는 비인과적인 방식으로 연결되고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양자역학은 자연의 진면목이 '비국소성'임을 보여준다. 중관사상은 자기 중심을 줄이고, 모든 생명에 대한 관심을 늘려, 뿌리 깊은 상호 의존을 실현할 것을 강조한다. 공의 원리에 따르면, 고립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는 없으며, 모든 존재는 상호 연결되어 있다. 상호 의존적 관계를 이해하면, 행복이나 아픔도 함께 하기 때문에 모든 유정의 복리에 대한 책임을 지니게 된다. 모든 고통받는 존재에게 마음을 열면, 자아와 욕망에 집중하는 마음이 약해져, 보편적 자비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불교에 도전하는 양자역학

      
    불교는 과거의 행위가 현재 상태의 원인이라는 '인과율'을 강조한다. 우리는 전생과 현생에서 행한 행동들의 결과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누구나 바른 행위를 해서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과학은 물리학적인 인과율만 허용하지만, 불교에서는 '업'과 같은 비물리학적 영향력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뉴턴 물리학에 따르면, 용수철 총에 쇠사슬을 넣고 쏘면 중력에 의한 가속과 운동거리를 측정할 수 있다. 쇠구슬은 매 순간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매 순간의 주관과 객관은 생기고 머물고 소멸하는 과정을 겪는다. 이 때, 중관 사상에 따르면, 대상을 구성하는 상호 의존과 연결은 무상함을 보증한다. 쇠구슬은 매 순간 같은 구슬인것처럼 보이지만, 구성 성분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쇠구슬이 항구적이라는 그릇된 믿음은 단지 감각 기능의 조잡함 때문이다.
      
    의식의 주된 원인은 바로 이전 순간의 의식 상태이고, 현재 의식은 바로 다음 순간 의식 상태의 주된 원인이다. 모든 사물은 주된 원인을 가지고, '비슷한 유형의 연속체인 주된 결과의 주된 생산자'로 정의된다. 쇠구슬의 궤적에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쇠구슬을 깎는 과정은 보조조건(부수적 원인)이다.

    수많은 직간접의 주된 원인과 보조조건들 속에 무한히 큰 상호 연결된 그물망을 가진다. 원인과 조건들의 복잡한 그물망으로 인하여 쇠구슬은 독립적이거나 본래적인 존재가 아니게 된다. 본질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어떤 것으로 필요로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면, 나의 행동들이 어떻게 미래로 전해지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중관 사상에 따르면, 행위는 생성- 머묾 - 소멸의 단계를 찰나에 거치게 된다. 소멸은 찰나에 또 다른 소멸을 일으키며 소멸하고, 그 소멸은 다시 새로운 소멸을 일으킨다. 각각의 소멸은 찰나에서 찰나로 진행되며, 생성-머묾-소멸의 과정에 참여한다. 소멸이 새로운 단계의 소멸을 계속해서 생산하는 과정은 자신의 업이 적절한 과보를 초래할 때까지 계속된다.

    빛은 상보적인 성질을 지닌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지닌다. 빛의 성질을 파악하기 위해 광선분할기에 빛을 투과하면, 빛이 입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광선분할기와 거울을 활용하여 빛이 반사되는 현상을 관찰하면, 중첩과 간섭현상을 나타내는 파동의 성질이 드러난다.
      
    양자 이론에 따르면, 향후의 측정 결과는 오직 가능성만을 제공한다.
    양자역학의 활동은 객관적인 상태에 대한 무지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측정에 따른 잠재적인 결과를 추정하는 것이다. 측정 이전부터 분명한 속성을 지닌 객관적 상태는 없으며, 측정 이전의 자연은 객관적으로 불확정적인 순수한 가능성의 상태이다.
      
    양자역학의 측정은 인과적인 양자 전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붕괴시켜 특정한 결과를 드러낸다. 양자 이론은 가능한 이론에 대한 확률예측만 할 수 있을 뿐, 결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은 수많은 실험으로 정당성이 입증되었지만, 물리적인 주관에 대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는 알기 어렵다. 즉, 양자역학은 언제나 측정 결과에 대한 확률만을 제공할 뿐이다.
      
    중관 사상의 인과관은 고전적인 뉴턴 물리학과 잘 맞아떨어지는 듯이 보이며, 양자역학의 인과율과 불일치하는 듯하다. 개개의 양자 사건들이 뇌 작용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면, 양자역학은 불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

    정신 상태와 상호 관계에 있는 뇌의 물리적 상태에 순수한 무작위성이 있다면, 도덕성에 영향을 주게 된다. 자신의 도덕적 행위가 돌이킬 수 없는 무작위성을 지닐 수도 있지만, 넓은 의미로는 통계학적 평균치를 가질 것이다.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무작위적으로 악을 초래할 수 있으며, 도덕적 행동이 항상 의도대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진화의 과정은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에 대해선 완전히 우연적이라고 한다. 즉, 진화는 목적과 원인이 없으며, 그저 자연선택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게 생물학적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윈주의의 입장은 불교의 '자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불교는 '괴로움'에 주목하지만, 다윈주의자들은 충분히 진화된 신경 시스템을 지닌 유기체만이 생존할 수 있다고 파악한다. 신경 시스템은 지구에 적응하기 위한 부분으로, 고통으로부터 도피했기 때문에 번식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돌연변이들은 자연선택에 필요한 새로운 후보들을 우연적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와 목적도 없다. 인과율을 강조하는 불교의 관점과는 달리, 현대 유전학은 유행병에서 살아남는 것은 완전한 우연의 작용이라고 설명한다.
      
    불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 비물리적인 요소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와 과학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일인칭의 주관적 기술을 과학적 실험 속에 편입하는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이 때, 달라이 라마는 과학이 불교 교리의 잘못을 분명히 입증한다면, 불교는 마땅히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대성 이론과 시간의 화살

      
    * 특수 상대성 이론의 공리

    1) 빛의 속도는 어떤 관성계 안에서도 광원이나 관찰자의 운동에 구애 받지 않고 일정하다.  
    어떤 것의 속도는 관찰자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므로, '계(system)' 안에서는 잠재적으로 측정가능하기에 독립적이지 않다. 속도를 논하기 위해선 최소한 하나 이상의 입자가 필요하며, 입자 사이의 거리와 상대적인 속도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의 첫 번째 공리는 모든 현상이 독립적이지 않다는 중관 사상과 완전히 일치한다.
      
    2) 물리학 법칙은 어떤 관성계 안에서도 동일한 형식을 취한다.
    모든 물리학의 근본 방정식은 모든 관성계 안에서 동일한 수학적 구조를 가진다. 디지털 음악 장치가 지상과 비행기에서 동일하게 작동하는 것은 전자기 법칙과 양자역학이 동일한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이동하는 시계는 정지한 시계보다 천천히 가는 것으로 측정된다. 더욱 본질적인 시간 간격'은 없으며, 시간의 간격은 단지 어떤 특정 기준의 계 안에서 측정될 때만 의미를 지닌다. 다른 시간보다 더 진짜인 시간 간격은 없고, 그저 모두 동등한 정당성을 지니기에 상대적으로만 고정된다. 시간 간격은 기준이 되는 계에 철저하게 의존하기 때문에 본래적인 값이나 수치를 가지지 않는다.
      
    에너지, 질량, 길이, 시간 등 모든 속성은 측정 기준이 되는 계에 크게 의존하며, 독립적이고 고유한 측정값이 없다. 정지한 관찰자가 볼 때, 짝을 이루는 동시발생적인 사건은 움직이는 다른 관찰자에게 동시에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라는 순간'은 동시에 발생하는 사건들의 총합으로 정의된다. 에너지, 질량, 길이, 시간과 같은 사건의 속성 뿐만 아니라, 현재라는 사건의 총합도 계에 의존하는 것이다. 즉, 현재라는 순간은 개개의 사건이나 사건들의 총합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이다.

    개개의 사건은 마치 과거에서 현재를 통과하여 무한한 미래 속으로 날아가는 시간의 화살처럼 생각된다. 마루에 공을 튀기는 영상을 뒤로 반전하면 이상한 부분이 전혀 없어보이지만, 달걀이 깨지는 영상을 돌리면 이상하다. 달걀을 깨는 일은 시간 반전이 가능하지 않으며, 시간대칭적이지 않다.
      
    화학적 변화를 지배하는 양자역학의 법칙들은 시간대칭적이다. 무질서가 심할수록 '엔트로피'가 증가하는데, 엔트로피를 줄이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 '볼츠만'은 반전 가능한 근본 법칙들로부터 반전 불가능성이 나올 때는 오직 그 시스템 속에 수많은 입자들이 있을 때뿐임을 발견했다.
      
    볼츠만은 우주로부터 고립된 상자를 가정하고, 칸막이로 나눈 다음, 한 쪽 칸막이에 모든 입자를 넣었다고 가정했다. 상자의 칸막이를 제거하면, 즉시 입자가 상자 전체에 고르게 분산되어 새로운 평형 배치를 취하게 된다. 고르게 분산된 입자들의 위치는 이전보다 더 적은 정보를 갖게 되어, 엔트로피가 높아지게 된다.
     
    엔트로피는 반드시 같은 상태에 머물거나 증가한다는 열역학 2법칙을 입증한다. 칸막이를 제거하면 입자는 더 큰 엔트로피의 상태가 될 개연성이 극도로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시간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우리는 이를 '미래'라고 부른다.
      
    에너지가 고온에서 저온 영역으로 이동할수록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우리 몸의 에너지를 공간 밖으로 방출하는 과정은 고정된 우주 속에서는 차단된다. 따라서 볼츠만의 유도는 '고립된 우주'를 가정함으로써 치명적인 결함이 발생했다.
      
    우주가 팽창하는 것은 곧 엔트로피를 증가하게 하는 것이며, 시간을 화살처럼 한 방향으로 흐르게 한다. '빅뱅의 최초 3분'이 핵 생산 속도보다 빨랐기 때문에 별들은 낮은 엔트로피 상태에 있게 됐다. 엔트로피가 정상적으로 증가하여 시간이 흐르는 것은 우주의 초기 전개와 팽창과 연결되는 것이다. 즉, 우리 주변의 모든 무상과 쇠퇴는 우주에서 가장 먼 최초의 과정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독립된 존재가 없다는 공은 본성상 지속적인 변화를 보장한다. 되돌릴 수 없는 과정들은 생명의 본질이며, 모든 것의 핵심은 공은 나를 생물학적 실체로 귀속시키는 것이다.

    사랑과 지식의 합일을 지향하며


    '존 휠러'의 '지연된 선택 실험'을 통해 중관 사상과 물리학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다. 광선분할기는 들어오는 광선의 강도를 절반만 받아들이고, 나머지 절반을 반사한다. 양자역학의 임의성으로 인해 어떤 광자가 반사될지는 모르지만, 평균적으로 동등한 양이 전송될 것이다.

    광선분할기에 두 거울을 설치하면, 거울에 각각 반사되어 서로 다른 검출기에 절반씩 기록된다. 여기에 광선분할기를 배제하거나 추가로 설치함에 따라 파동이나 입자의 성질이 각각 나타나게 된다. 펨토초의 결심에 따라, 빛의 성질이 입자가 될 지, 파동이 될 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지연된 선택 실험은 모든 관찰 상황과 관계 없이 양자적 물체에 확정적 속성을 부여할 수 없음을 천명한다. 양자적 물체들은 독립적이거나 본래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오직 실체의 측량이라는 맥락에서만 규정되는 것이다.
      
    공은 모든 사물이 예외없이 비어있으며, 의존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자연의 근본적인 상호 연결은 관찰자와 관찰자가 묻는 질문과의 연결이다. 빛의 성질 뿐만 아니라, 은하 성단의 성질도 관찰자의 기준이 되는 계 안에서만 규정된다. 은하들은 개별적이든 성단이든 기준이 되는 계와 무관한 크기, 질량, 시간 간격의 수치를 갖지 않는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걸림돌을 '차별'이라고 주장한다. 뉴턴 물리학의 세계관은 모든 것에 본래적 존재를 투사하는 고유한 성향을 강화시킨다.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은 모든 현상은 상호 의존적이며, 다른 요소의 관계에 의해서 규정됨을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은 양자 물리학과 상대성 이론의 의미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과학 혁명은 이해 여부와 별개로 우리의 일상 생활 속 고통을 낮출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현대 물리학의 '하드웨어적 적용'보다 '소프트웨어적 적용'이 중요하다.
    과학적 세계관이 그 자체로 이상세계를 가져오지는 않지만, 친절히 더 큰 역할을 하도록 격려할 수는 있다. 상처를 깨끗이 하는 것이 미생물학의 이해보다 중요한 것처럼, 양자 비국소성의 이해보다 자비의 실천이 더욱 중요하다.
      
    공을 이해할수록 더욱 완전하게 친절하게 되고, 자비를 실천할수록 공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중관 사상과 현대 물리학이 공동으로 작업할수록 견고한 연결이 형성되어 상호 의존성이 자비로서 드러날 수 있다.
      
    과학이 전해준 기술의 힘으로 인류를 파괴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우리의 생존은 상호 연결되어 있으므로, 진화론의 관점과 사랑과 지식, 친절, 이해를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과 종교의 협력은 우리의 진화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