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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유호종의 『철학자의 우주산책』

 


    「철학자의 우주산책」은 현대 물리학과 천체 물리학, 양자역학 등 다양한 과학 이론들을 복잡한 수식없이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는 점에서 큰 강점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 교수님의 작품이라 번역투의 어색한 문체도 없어서 다른 과학과 우주와 관련된 책들 중에서 깔끔하게 잘 읽히는 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의미는 우리에게 소중하고 깊은 만족감을 주며 목표를 부여해 준다. 우리 인간은 우주 속에 존재하므로, 우주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주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큰 공허감과 자신의 하찮음이다."

    어릴 때 부터 우주는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자 신비의 상징으로 보여졌다. 광활하고 칠흑과 같은 심연을 보면 끝없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끼곤 했다. 물리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려면 필연적으로 수학적 공식에 대한 이해가 병행되어야 한다.

    물리학은 천재들만 하는 학문. 물리학은 복잡하고 어렵다는 편견이 점차 쌓일 무렵,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게 되었다. 장엄한 우주의 이야기를 서정적인 문체로 써내려가는 칼 세이건의 문장에 큰 감동을 받았다. 무엇보다 어려운 수학 공식 없이도 인문학적으로 우주와 천체 물리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러나 「코스모스」는 80년대에 저술된 책이다보니, 현대의 관점에선 다소 바랜 내용들이 존재한다.

    천체 물리학적 관점으로 바라본 빅 히스토리라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보다 본격적으로 현대 물리학의 연구 성과가 담겨진, 그리고 거기에 인문학적 시선도 곁들여진 책이 없을지 찾아보았다. 그리고 찾게 된 책이 바로 이 책 「철학자의 우주산책」이다.

    교수님의 약력을 보니, 국어와 철학을 전공하신 분이었다. 그 때문인지, 최대한 수학적인 설명은 지양하고, 문장을 풀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부분이 인상깊었다. 우주관의 변천과 우주관에 내재한 철학적 관점, 그리고 다중우주론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론들은 교수님이 뒤에 인용한 다른 저서들을 읽어보게끔 만들어주었다.

    다중우주가 실재한다는 관점 아래에서 나의 탄생과 인생의 의미, 그리고 신과 종교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는 점이 신선하고 독창적이었다. 다양한 과학적 연구 성과들과 그에 따르는 해석의 관점들은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여 지적 즐거움을 주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초중반부의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후반으로 갈수록 과학적 증명의 한계로 인해 다소 힘이 빠지는 모습이 보였다.

    우주라는 특성상, 논리적이든 과학적이든 엄밀하게 증명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저자의 논리는 상상과 직관에 근거하여 결론으로 이끌어가고 있는데, 분량과 논리의 정밀성 및 엄밀함 부분에서도 빈틈이 많이 보였다. 이를테면, 기본적으로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다중우주의 존재를 확신하면서 주요 논지를 전개한다는 점. 다중우주의 존재 여부를 명확히 증명하지 않는다는 점. 과학의 한계점을 지적하지만 새롭고 독창적인 관점을 제시하지는 못했다는 점 등이 있다.

    후반으로 갈수록 힘이 빠지는 점은 분명 아쉬웠지만, 전체적인 책의 내용 구성이나 서술 방식, 그리고 인문학적 관점에서 서술된 흥미진진한 현대 물리학 이론에 관한 내용들이 재미있게 독서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 같다. 우주와 인간 실존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우주관의 변천


    1) 고중세의 신령한 우주


    고중세 시대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고정되어 있는 지구의 둘레를 태양, 달, 행성, 별이 회전한다고 간주한 '천동설'을 주장했다. 천동설은 중세까지 확고한 진리로 간주되었는데, 이는 해와 별이 떠오르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감각경험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당시 사람들은 천동설을 바탕으로 인간이 우주에서 중심이 되는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파악했다.

    2) 근대의 공허한 우주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천동설을 대체하여, 고중세의 우주관을 붕괴시켰다. 즉, 지동설에 따라 우주의 완전함과 인간의 특별함이 부정되었던 것이다.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관측은 행성이 완전한 원이 아니라 타원의 형태임을 밝혔고, 뉴턴은 우주의 천체도 지구의 자연법칙과 동일한 법칙이 적용되어 맹목적으로 운동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은 우주에서 어떤 목표나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인류는 허무함과 하찮음을 느끼게 되었다.

    3) 현대의 초월적 우주


    현대의 과학기술 발전에 따라 우주에 관한 지식은 폭발적으로 늘었고, 다양한 현상들을 분석하여 다중우주의 가능성을 파악하게 되었다. 태양계 이외의 항성계 발견, 외계 은하의 발견, 다중우주의 존재 가능성 등은 기존의 공허한 우주관이 아니라, 초월적 우주관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우주의 드러난 모습


    1) 거대함


    우주는 약 138억년 전의 빅뱅으로 탄생하였고, 이를 1년으로 환산한다면 인류는 12월 31일 밤 11시 52분에 출현한 셈이다. 이에 따르면, 인류의 모든 문명은 마지막 1분에 이루어졌고, 개별 인간들은 평균 0.15초를 산다.

    관측 가능한 우주는 반지름만 465억 광년으로, 인간이 우주를 탐사한 거리는 지구 모래 한 알의 500만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지구의 생명체는 전적으로 태양 에너지에 생존을 의존하는데, 지구가 받는 태양 에너지는 태양 총 에너지의 20억분의 1에 불과하다.

    우주에는 약 2000억 개의 은하가 있고, 은하 당 3500억 개의 별이 있어서, 이 모든 항상이 방출하는 에너지는 헤아릴 수 없을만큼 거대하다. 물질 형태로 된 에너지, 진공 에너지 등 우주 전체의 에너지를 고려하면 그 양은 어마어마하다 크다.

    2) 극단적 다양성


    우주에는 지구보다 훨씬 다양한 물리량, 물리현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천체의 중력으로 중력이 중심 방향으로 수축하는 중력 붕괴 현상으로 인해 행성, 항성, 그리고 블랙홀이 탄생한다.

    3) 기묘함


    특수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서로 결합하여 4차원의 시공간을 이루고 있다. 움직이는 물체는 공간 속에서 이동속도가 0보다 크기 때문에 시간 속에서의 이동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느려진다. 이 때, 공간 속에서의 물체의 이동속도가 빛의 속도와 같아지면, 시간 속에서의 이동속도는 0이 되어, 그 물체의 시간이 멈추게 된다.

    질량 보존의 법칙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르면, 물질은 사라지지 않고 그 형태만 변화하기에 총량은 항상 일정하다. 물질과 에너지는 주변 시공간을 뒤틀고 휘어지게 하므로, 시공간과 물질, 그리고 에너지는 서로 동등하게 연계되어 있다.

    우리의 직관은 거시물체를 대상으로 형성되어있으나, 소립자들의 움직임은 뉴턴역학의 물리법칙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중 슬릿 실험'에 따르면, 입자와 파동은 관측 여부에 따라 입자와 파동 두 성질을 모두 나타낸다. 이를 '코헨하겐 해석'은 아원자 입자가 관측이 행해지기 전에는 여러 고유 상태가 중첩된 상태로 존재하다가, 측정이 시행되는 순간 하나의 고유한 상태로 붕괴된다고 설명한다.

    '양자얽힘 현상'에 따르면, 얽힌 관계에 있는 두 입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어도 한 입자의 위치나 속도가 결정되면 다른 입자의 위치나 속도도 동시에 결정된다고 한다. 이처럼 우주는 기묘한 아원자 입자들의 운동 방식에 의해 형성되었으므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블랙홀'은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해, 우주에서 가장 어둡지만, 역설적으로 블랙홀의 중력으로 인해 우주에서 가장 밝은 빛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블랙홀의 특이점은 중심에 위치하여 모든 질량이 몰려있는데, 이는 말 그대로 밀도가 '무한'하여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이다. 유한하지만 엄청나게 거대한 것과 무한한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블랙홀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합하는 이론이 필요하다.

    4) 탁월함


    모든 물질은 원소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것으로, 각 원소들은 각각 다른 종류의 원자들로 이루어져있다. 원자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로 이루어지며, 이것들이 몇 개씩 결합하느냐에 따라 원자의 종류가 달라진다. 원자와 입자들의 새로운 계층구조가 발견되어, 물질 구성과 관련된 12종의 '기본 입자'가 발견되었다.

    기본 입자는 다른 것이 동일하지만 전하만 반대인 '반입자'가 존재하고, 모든 기본 입자는 반입자를 가진다. 기본 입자들을 결합하여 만들어 낸 '합성입자(중입자)'도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생소한 합성입자가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

    우주의 '보통물질'들은 전자, 중성자, 양성자라는 3개의 입자와 2단계의 계층구조만 있다면 대부분 만들어낼 수 있다. 전자의 이중성이 사라지면, 전자는 원자핵 주변에 안정적으로 위치할 수 없고, 원자와 원자를 묶어 분자를 이룰 수도 없게 된다.

    입자가 관측될 위치는 확률적으로 정해진다는 특성에 의해, 자신의 에너지보다 준위가 높은 에너지 장벽을 넘는 '양자 터널 효과'가 발생한다. 양자 터널 효과로 인해 전자는 3m 철벽을 통과할 수 있고, 핵 융합반응도 가능해진다. 
    원자가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면 같은 조건에서 늘 같은 현상만을 발생시키지만, 원자는 확률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다양한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5) 초월성


    현대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은 물질이 매우 역동적이고 기묘하며 탁월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다. 우주는 불가능한 규모와 특성을 가진 다양한 자연현상이 발생하는 곳이므로, 우주를 단순히 공허하게만 볼 수는 없다. 현대과학이 밝혀낸 우주는 인류가 짐작한 크기, 다양성, 가능성을 훌쩍 뛰어넘는 초월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가려진 모습


    1) 우리 우주에 대한 착각


    인간은 천구 착시로 인해 압도하는 듯한 거대한 크기와 높이, 깊이를 제대로 지각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우주를 보고 느끼는 장엄함의 정도는 수 킬로미터 떨어진 물체를 볼 때 느끼는 장엄함의 정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우주는 빈 공간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크다. 따라서 천체가 있는 곳은 우주에서 전형적인 장소라고 할 수 없다. 우주의 어느 한 곳을 무작위로 찍었을 때 그곳이 운 좋게 행성 바로 위나 근처일 확률은 10의 마이너스 33승에 불과하다. 즉, 우주는 광대하고 냉랭하고 어디로 가나 텅 비어 있으며, 끝없는 밤으로 채워진 은하 사이의 공간이다.

    우주는 마냥 빈 공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빅뱅 38만 년 후에 방출된 빛의 파장인 '우주 배경 복사'는 우주의 거의 모든 공간을 채우고 있다. 거의 완벽히 진공인 공간에서도 수시로 입자와 반입자가 동시에 생성되었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양자요동 현상'도 발생한다.

    우주의 깜깜한 빈 공간은 미시적으로 볼 때 명멸하는 입자들과 그에 따른 전자기장, 강력, 약력의 요동으로 가득 찬 혼돈과 광란의 도가니로, 시공간 역시 요동치고 있다.

    2) 우리 우주에 대한 무지


    우주의 원자, 에너지, 입자, 열 등을 합쳐서 '보통물질'이라고 한다. 현대 물리학에 따르면, 우주는 보통물질 이외에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로도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우주 전체 에너지 중에서 이 셋이 차지하는 비율에 대해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것은 제각각이다. 제시된 값이 차이 나게 된 원인은 근본적으로 측정의 어려움 때문이다. 가장 최신 데이터에 따르면, 보통물질 5%, 암흑물질 25%, 암흑에너지 70%로 파악되고 있다.

    우주의 물질량은 확인된 중력효과에 비해 훨씬 작은데, 관측한 만큼의 물질만 은하에 있다면 묶여 있던 은학들은 금세 은하단을 벗어나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기 때문에 추가적인 중력이 작용되는 무언가, 즉 '암흑물질'이 존재한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현재 암흑에너지의 정체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고 볼 수 있다.

    3) 다중우주에 대한 무지


    사람들은 오랫동안 관측가능한 '우리 우주'가 존재하는 유일한 우주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우주론, 통일장 이론, 전산물리학 등 물리학을 크게 발전시켰던 기본이론들은 한결같이 다양한 다중우주론을 예견하고 있다. 즉, 우리 우주는 훨씬 더 큰 거대우주에 파묻혀있다는 것이다.

    다중우주가 존재한다면, 다음과 같은 종류의 다중우주가 존재할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 초기조건이 다른 다중우주: 입자는 관측 전에는 여러 상태로 동시에 존재하지만 관측됨과 동시에 갑자기 그 중 한 상태로 붕괴된다. 이에 따르면, 우주가 여러 개로 분기하면서 입자의 여러 상태 역시 각각의 분기된 우주에서 각각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이렇게 실현된 우주는 분기된 시점을 기준으로 볼 때 초기조건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초기조건이 달라서 생명의 존재 가능성이 없을 수도 있지만, 초기조건에 따라서 생명체가 우글거리는 우주가 있을 수도 있다. 

    * 물리상수가 다른 다중우주: 인플레이션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탄생후 10의 마이너스 35초부터 32초 사이의 극히 짧은 시간 동안 10의 26배 이상 지수함수적으로 팽창했다고 간주한다. 우리 우주는 급팽창이 끝났지만, 전체 우주로 보면 급팽창이 계속되는 영역이 있는데, 그 일부에서 급팽창이 다시 끝나고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기를 계속할 수 있다. 이러한 '인플레이션 다중우주'는 물리법칙은 같지만, 인플레이션의 종결 방식에 따라 물리상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물리상수가 다른 우주가 우리 우주보다 못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이, 우리 우주와 다른 값의 물리상수들이 작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존재 형태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물리법칙이 다른 다중우주: 아무런 이유 없이 특정한 수학적 구조와 방정식에 대응하는 우주가 존재한다면, 순전히 우연일 것이다. 따라서 수학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구조는 물리학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수학적 구조와 방정식마다 대응하여, 물리법칙이 다른 무수히 많고 예측하기 어려운 다중우주들이 존재할 수 있다.

    4) 전체 우주의 초월성


    현대 과학은 우리 우주의 대부분이 가려져 있음을 밝혔다.
    우리 우주의 구성 요소 중 보통물질은 약 5%에 그치고, 나머지 95%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로 이루어져있다. 우리 우주만해도 우주의 가능성을 탁월하게 만들고 있는데, 다중우주가 존재한다면 물리현상의 다양성과 가능성의 폭이 훨씬 커지게 된다.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발달해도 우주의 가려진 부분의 많은 곳은 영원히 무지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 범위를 벗어나 있는 '초월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 때, 우주를 초월적이게 만든 특징들은 어떤 신적인 존재를 함축하지 않는다.

    초월적 우주에서 느끼는 신비감은 우주를 낯설고 대립적인 것만으로 인식하지 않게 해주며, 대신 우주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품게하여, 인간이 계속 새롭고 발전된 모습으로 변해가는 자기초월적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기대하게 한다.

    나의 탄생과 유물론


    1) 내가 태어날 확률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나의 탄생이다. 내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우주의 존재조차도 나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 과학에 따르면,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하고, 우리 우주에서 생명이 발생하여 인간종으로 진화하고, 인간종의 역사에서 나의 조상들이 태어나고, 이어서 내가 태어났다. 나의 탄생은 빅 히스토리의 결과이다. 이에 따라, 나의 탄생 확률을 공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우주만 있다면 내가 탄생할 확률 < 우리 우주가 생명 탄생이 가능한 우주로 발생할 확률 * 우리 우주에서 생명이 발생할 수 있는 행성의 수 * 한 행성에서 인간 종이  발생할 수 있는 확률 * 인간 종의 역사에서 나의 발생 확률

    - 우리 우주의 발생 확률: 우주의 기원을 명확히 알 수 없으므로, 가장 큰 가능성인 1로 가정한다.

    - 우리 우주가 생명 탄생이 가능한 우주로 발생할 확률: 생명체를 구성하는 원소들이 발생하고, 지구와 같은 행상들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여러 물리상수들이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값으로 아주 작은 단위까지 미세조정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한다면 1/(2 * 10의 260승)이라고 할 수 있다.

    - 우리 우주에서 생명이 발생할 수 있는 행성의 수: 우리 우주가 생명 탄생의 여러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생명이 발생하고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는 행성은 많지 않다. 이를 계산하는 방정식으로 '드레이크 방정식'이 있다.

    드레이크 방정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n = 우리은하에서 1년 동안 탄생하는 항성의 수 * 항성들이 행성을 갖고 있을 확률 * 항성에 속한 행성들 중에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의 수 * 조건을 갖춘 행성에서 실제로 생명체가 탄생할 확률 * 탄생한 생명체가 지적 생명체로 진화할 확률 * 지적 생명체가 다른 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통신 기술을 갖고 있을 확률 * 통신 기술을 갖고 있는 지적 생명체가 존속할 수 있는 기간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 우주에서 드레이크 방정식을 모두 만족하는 행성은 약 6개 정도라고 한다.

    - 인간 종에서 내가 탄생할 확률: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나의 부모가 나를 낳아야 하는데, 특정한 남녀가 실제로 맺어지고 아이를 갖는 것은 엄청난 우연이 작용한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현대 인류는 약 20만 년 전에 동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이에 근거하여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우리 조상들에서 내가 태어날 확률은 1/10의 66억 8100만승이다. 여기에 정자와 난자가 배출되는 경우의 수까지 모두 고려한다면, 3/(10의 935억 5340만 260승)이라고 할 수 있다.

    2) 우주에서 가장 놀라운 일


    과학에서는 탄생을 그저 우연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탄생 이후의 삶에서는 1/100이나 1/1000의 행운도 맞이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나의 탄생 확률이 극도로 희박하다면, 탄생이라는 우연은 엄청난 행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가장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신의 존재'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내가 태어날 확률이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보이려는 시도를 했다.

    3) 나의 탄생 확률을 높이는 단계적 방법


    복권을 단 한 장만 샀는데 당첨되면 놀라운 일이지만, 각기 다른 수백만 장을 사서 당첨됬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현대 물리학은 다중우주를 가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제각기 다른 물리상수를 갖는 무수히 많은 우주들이 존재하지만, 전체 우주 중에서 우리 우주처럼 미세조정된 우주로 있을 확률이 충분히 존재한다. 즉, 우연히 모든 물리상수가 미세조정되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주 중에서 생명 탄생이 가능한 조건이 맞춰진 우주였기 때문에 생명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창조론자 '프레드 호일'은 생명이 지구에 출현할 확률을 가리켜, 고물 야적장을 휩쓰는 태풍이 운 좋게 보잉 747을 조립해 낼 확률과 별 다를 바 없다고 비유했다. 그러나 자연에서 생명체가 발생한 것은 어느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행성 중에서 조건이 잘 맞아떨어진 행성에서 단순물질이 발생했고,  단순물질로부터 원시 생명이 발생하고, 점점 더 복잡한 형태로 단계적으로 진화해서 인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1953년 스탠리 밀러는 원시 대기를 모방한 실험관에서 생명체를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일부를 만들어 내는 실험에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 아미노산에서 생명체를 합성하는 실험은 성공하지 못했고, 생명체가 탄생한다고 하더라도 원핵세포, 진핵세포, 지적 생명체로 이어지는 진화는 아직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인간 종이 탄생했더라도, 내가 탄생할 수 있는 확률은 낮다. 미세조정된 우주의 탄생, 우주에서의 인간 종 발생을 고려하더라도, 정작 인간 종에서 '내'가 발생할 수 있는 확률은 극도로 희박하다. 이 부분은 과학자들도 극도로 낮은 확률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4) 동시적 다중우주에서의 탄생


    우주가 무한개 있다면 내가 태어날 확률은 높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가 수만 개나 수억 개 정도만 있는 정도라면 우연한 확률이 적중되었다고 수긍하기는 힘들 것이다. 무한한 다중우주를 가정한다면, 내가 태어날 확률은 63.3%라고 한다.

    다중우주가 무한하다면, 우리 우주와 완전히 똑같은 복사본 우주도 존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나의 복사본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이고, 우주는 무한하기 때문에 나의 복사본도 무수히 많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만약 무한 다중우주에서 나의 복사본들이 입자 배열까지 완전히 동일하다면, 그들은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의심하고 이해하고 부정하고 원하고 원하지 않으며, 또한 상상하고 느끼는 그런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바로 나라고 간주한다. 즉, '생각하는 의식주관으로서의 나'가 진정한 나라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나 기억만으로는 내가 나이게 만드는 요소로 간주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나의 복제인간을 만든다면, 원본과 복제인간 모두 나라고 간주할 수 있을까?
    의식주관이 완전히 동일하다면, 서로 다른 위치에 존재하는 '내'가 서로 다른 감각자극을 받아들일 때, 다른 몸도 동시에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본과 복제본의 두뇌 상태가 동일하더라도, 두 신체에는 다른 의식주관이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다른 두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가정이 맞다면, 다중우주에 있는 나와 두뇌가 동일한 나의 복제본들도 나와 완전히 동일한 존재라고 하기 위해선 다중우주에 존재하는 신체들의 지각 모두를 나의 지각으로 경험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나의 지각들을 살펴본다면 다른 우주의 복제본의 지각이라 할 만한 것을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나와 의식주관이 완전히 동일한 복제본이 현재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해야 할 것이다.

    5) 시간적 다중우주에서의 탄생


    동시적 다중우주가 '나의 탄생'이 걸린 복권을 한꺼번에 왕창 사는 것이라면, 시간적 다중우주는 한 장에서 몇 장의 복권을 꾸준히 계속해서 사는 것에 해당한다.

    어떤 우주가 한 번에 하나씩만 연달아 생겼다 사라진다고 가정하면, 나와 똑같은 복제본이 발생하더라도 그 복제본은 나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적 다중우주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나의 탄생의 희박한 확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우주과학에서 이론적으로 더 잘 정립되고 지지되는 것은 동시적 다중우주이다. 따라서 아직은 오늘날의 과학의 관점에서 물리주의만으로 나의 탄생을 잘 설명하기는 어렵다.

    유신론과 다중우주


    1) 나의 탄생과 신의 양자역학적 개입


    확률이 낮은 일이 발생하는 것이 언제나 이상한 것은 아니다. 유물론에 따르면, '나의 탄생의 희박한 확률 문제'를 다중우주라는 방안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유신론은 신의 존재를 요청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 개입하지 않는 신: 신은 우리 우주를 창조했지만, 창조 후에는 물질과 에너지가 자연법칙에 따라 전개되어 나가도록 놓아 둘 뿐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다는 입장

    신은 그가 원하는 대로 우주가 진행되기 위해 초기 상태만 잘 계획했고, 그 이후에는 신의 개입 없이도 신의 계획대로 우주가 변해나간다. 이와 같은 입장에 따르면, 우주의 물리적 역사는 미리 정해진 것으로, 외형적으로 볼 때는 무작위의 변이와 자연선택의 과정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의 계획에 맞게 결정론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현대의 양자역학에 따르면, '개입하지 않는 신'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전자와 같은 입자는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형태로 있다가 관측을 할 때 어느 한 곳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입자들로 이루어진 거시물질계 역시 앞으로 어떤 상태로 변화할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우주는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양자붕괴의 우연성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신에 어떤 계획을 갖고 있었더라도 그 계획을 확실하게 실현시키는 최초의 상태를 만들 수 없다.

    * 가끔씩 개입하는 신: 신은 보통 때는 자연이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변화하도록 놓아두다가, 가끔씩 필요할 때 기적을 일으켜 개입한다는 입장

    '지적 설계론자'들은 생명체가 지적 존재에 설계되었다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이 우주의 물리상수나 생명, 의식을 설계했다고 하더라도, 나의 탄생은 자연법칙에 위배하여 태어날 수 없다. 처녀로부터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자연법칙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이 존재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아주 희박한 확률을 뚫고 우연히 태어난 것이다. 나의 탄생을 신에 의한 기적으로 믿는 것은 설계라기보단 우연으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해보인다.

    * 항상 개입하는 신: 신이 나를 태어나게 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경로'를 모두 봉쇄했다는 입장

    신은 전능하기 때문에 모든 양자요동과 붕괴의 확률적 순간에 개입할 수 있다. 그런데 신이 존재한다면 왜 하필 나의 탄생을 의도했던 것일까? 신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2) 신의 존재에 대한 여러 입장들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 아퀴나스의 목적론적 증명과 같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전통적인 논증들이 있지만, 대다수의 전문가들에게 설득력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증명도 많은 반박을 받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타당한 입장은 '알 수 없다'라는 불가지론밖에 없어 보인다.

    무신론자들은 다음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하면서, 신이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 과학의 발전으로, 자연과 우주를 설명하는 신은 더 이상 불필요하다.
    - 현실에서의 악의 존재는 신의 존재와 양립하기 어렵다.
    - 직관적으로 볼 때 신이 없음은 분명해보인다.

    3) 과학의 발전과 신의 자리


    과거 인류는 여러 자연현상들을 신이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은 자연현상을 자연의 요소들만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자연현상의 설명에서 신이 필요한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유신론자들은 과학이 많은 자연현상을 설명했지만, 그래도 설명하지 못하고 남은 틈새가 있기 때문에 여전히 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 틈새 역시 결국 과학이 더 발전함에 따라 메워질 것으로 간주한다.

    독일의 생리학자 '에밀 뒤부아레몽'은 1880년에 과학이 해명할 수 없는 7가지 문제를 나열했다.

    - 물질과 힘의 본질
    - 운동의 근원
    - 생명체의 발생
    - 자연의 조화
    - 감각과 의식의 발생
    - 이성적인 사유와 언어의 시원
    - 의지의 자유

    이는 아직도 대부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과학은 기존의 규명되지 않은 문제를 차례로 해결하고 있지만, 그보다 빠른 속도로 규명되지 않은 새로운 문제들이 증가하고 있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자연은 이전에 알았던 것보다 훨씬 크고 복잡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과학은 일정 부분 그 기초를 신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과학의 기본이 되는 전제 중 하나는 자연법칙의 불변성이다. 이런 전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과 우주를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연법칙의 불변성은 '신의 불변성'이라는 개념에 근거하여 형성된 것이다. 즉, 자연법칙의 불변성은 종교가 남긴 흔적으로서, 과학자들은 여전히 신에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4) 악의 문제와 다중우주


    세상에는 생존경쟁, 약육강식, 전쟁, 재난, 질병 등 많은 고통과 불의가 존재한다. 악의 문제는 전통적인 유신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유물론적 관점에서는 악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선과 악이 모두 물질에서 발생가능한 것이라면, 물질이 우연히 배열되어 만들어진 실제 세계에 선이 우연히 존재하는 것처럼 평균적으로 악 역시 존재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능한 최선의 세계'로 설명한다. 이 세계는 악이 존재하긴 하지만,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때의 악은 일종의 '도구적 악'으로서, 선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악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아무런 악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생명체나 의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아 고통을 느낄 주체가 없는 세계일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기쁨이나 쾌락과 같은 선도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선악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 세계보단 선악이 공존하는 세계가 더욱 바람직해보인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정말 최선의 세계인지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지금의 세계가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면, 나의 존재는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최선의 세계에서는 가장 선하고 뛰어난 사람들만 태어났을 것인데, 분명 나는 가장 선하고 뛰어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런 세계에 내가 태어났더라도 태어난 순간부터 그 세계는 더 이상 최선의 세계로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또 다른 악의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는 자유의지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선과 악 중에서 악을 택할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때의 악은 자유의지의 결과물로 존재하기 때문에 단순히 기계적으로 선한 로봇같은 존재만 존재하는 세계보다 훨씬 더 좋은 세계라고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의지에 오롯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항상 선한 결과가 나오게끔 행사하지 않는다. 실제 인류 역사에서는 자유의지에 따라 폭력과 대학살을 자행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신론자들은 신은 최선의 세계를 포기하면서까지 나를 존재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나일까? 나보다 더 선하고 뛰어나 태어날 자격이 더 큰 인간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에 대한 유신론자들의 대답으로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다."이다. 이러한 유신론자들의 가정은 우리의 세계가 단 하나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그런데 만약, 신이 여러 세계를 실현시킬 수 있도록 '다중우주'를 만들었다면, 더 이상 지금 우리의 세계가 최선이라고 간주하지 않아도 된다.

    비유하자면, 어떤 도시에 최고급 호텔만 있는 것보다, 중저가 호텔, 모텔, 여관, 여인숙까지 모두 갖춘 도시가 여행자에게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최선의 세계만 있는 단일우주보단 각 단계의 세계가 모두 있는 다중우주가 더욱 훌륭하다. 그러나 유신론에 따르면 다중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는 나의 자동인형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여러 존재 중에서 신이 의도한 한 두뇌에만 영혼이 들어가 의식이 생길 수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5) 신에 대한 믿음의 근원


    신의 부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직관'에 근거하여 설명한다.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과 같은 우주에 대상이 없다고 증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신도 마찬가지라는 입장이다. 그런데 신에 대한 믿음의 원천은 신에 대한 직접 체험이나 증언들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진실한 것이라고 믿어서 신을 믿는다.

    제우스, 오딘 등 과거에 숭배되던 신들이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신에 대한 믿음 자체가 없어지기보단, 신들을 통해 표현된 신성을 더 잘 표현하는 신으로 옮겨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과학으로 비교하면, 과학이 발전해감에 따라서 과거의 잘못된 이론을 수정하고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인다. 이처럼 과거의 신을 더 이상 믿지 못한다는 것 만으로 신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6) 유신론의 한계와 불가지론


    유물론적 관점은 '나의 탄생의 희박한 확률문제', 유신론은 '악의 문재'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적 다중우주'에 호소해야 한다. 오늘날 시점으로는 유물론과 유신론 모두 어느 것도 충분히 설득력 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가장 현명한 태도는 어떤 세계관도 지지하지 않고 불가지론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무지의 원인과 범위


    1) 인간 인식의 한계


    인간은 자신을 위협하는 대상에 대응하기 위해 인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우주는 엄청나게 거대하기 때문에 제한된 경험만으로는 완전히 파악하기 어렵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외부세계를 있는 그대로 지각한다고 보기 힘들다. 감각기관이 받아들이는 자극의 영역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험기구로 인간의 감각 경험을 확장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한계는 존재한다. 이러한 한계는 정신의 활동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간주되지만, 여전히 한계는 존재한다. 귀납 추리와 연역 추론 모두 오류가 존재할 수 있고, 부적절한 개념 사용, 개념의 모호한 사용 등으로 혼란스워질 수 있다.

    2) 우주의 인식 초월성


    우주의 단순해보이는 현상조차 실제로는 우리 인간이 정확히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다. 우주의 많은 것들은 하나의 숫자나 개념으로 포착될 수 없는 복잡성과 변동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우리가 어떤 지적 노력을 하거나 관측 장비의 발전으로도 완전히 극복하기 어렵다.

    우주의 모든 단서를 포착하더라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우주 탄생부터 약 138억년 동안 빛이 여행해 도달할 수 있는 영역만 볼 수 있다. 빛이 도달할 수 없는 우주의 지평성 너머의 영역은 어떤 고도의 과학 장비로도 관측할 수 없다.

    우주는 합리성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과학자들은 자연법칙이 불변하고 영속한다고 가정하지만, 그 자체로 볼 때는 필연성보단 우연성에 가까운 성질이 더 많이 보인다. 자연법칙의 영속성을 뒷받침할 유일한 근거는 자연법칙의 변화가 관찰된 적이 없다는 사실뿐이다.

    3) 무지의 범위와 정도


    칸트는 우리가 감각으로 지각하는 경험세계와 그 배후에 있는 물자체를 구분한다. '물자체'란 본래세계와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물자체에서 기원하는 소재를 바탕으로, 인식주관이 구성한 경험세계만을 알 수 있을 뿐, 물자체는 결코 알 수 없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수천 년 이어진 철학적 탐구와 논쟁으로 나온 본래세계란 무엇인가 대답은 '답을 알 수 없다'는 한계의 인정이었다. 

    현대 인지생물학에서도 우리는 실제로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관점이 우세하다. 뇌는 바깥 세계와 직접 만나는 일 없이, 특정하게 변환된 전기 신호만을 접하기 때문에 그러한 전기 신호는 다른 전기 신호에 의해 간섭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식주관이 구상하는 경험세계인 우주에 대해서도 인간의 앎에 뚜렷한 한계가 있다.
    다중우주, 암흑물질, 블랙홀, 암흑에너지와 같이 경험세계에서도 인간이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것 투성이다.

    이제 현대과학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고 가정한다. 즉, 과학 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라, 무지의 혁멍이었던 것이다.

    인간 두뇌는 한정된 수의 뉴런으로 이루어진 주먹 두 개 크기의 조직으로, 고유한 원리에 따라서 작동한다. 이러한 특수한 조직에 의존하는 인간의 감각경험과 지성이 모든 것을 잘 파악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무지에 대한 대처


    1) 무지의 자각


    인간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은 생리학적, 심리학적 기제를 이용해 자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 잘 안다고 확신하는 경우가 많다.

    고중세의 종교적 믿음이나 근대의 이성 및 과학에 대한 신뢰에 비한다면, 현대인들은 자신의 무지를 어느 때보다 더 잘 깨닫고 있다. 현재 인류는 우주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이 훨씬 많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주의 세부 내용만 모르는 것인지, 근본 법칙이나 원리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2) 과학자의 한계


    오늘날 성직자를 대신하여 지식의 원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과학자이다. 진리에 대한 과학자들의 집념과 노력, 과학의 정밀한 방법론 및 검증 체계, 과학이 산출한 결과의 유용성 등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과학자를 크게 신뢰한다.

    사람들이 위대한 과학자라고 떠올리는 아인슈타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라도 오류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그는 양자역학을 거부했고, 우주의 팽창과 블랙홀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했다. 또한 중력파와 중력렌즈의 관측 가능성도 부인했다. 아인슈타인이 범한 오류를 본다면, 다른 과학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실수를 한 것은 그가 과학적으로 철저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전공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아무리 철저한 과학적 태도를 유지하더라도 틀릴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독단으로 흐르기 쉽다. 따라서 과학적 태도의 기본은 '우리는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3) 열린 태도


    자신의 무지를 자각한다는 것은 자기의 현재 생각들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류는 불과 약 230년 전까지만 해도 블랙홀 같은 것을 거의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블랙홀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이론까지도 일부 부정했다.

    과학자들은 더 이상 갖고 있는 정보들에서 논리적으로 판단을 이끌어 낼 수 없는 경우에는 그의 세계관 등에 기초한 직관을 통해 판단을 내린다. 따라서 직관에 근거한 판단의 옳고 그름은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

    과학자가 진리라고 최대로 믿을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하더라도, 그 결론은 여러 가능한 견해들 중 하나이며, 틀릴 수도 있다는 가벼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태도를 가지기 위해선, 무엇보다 인간의 인식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자기의 현재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떠올릴 필요가 있다. 또한 인류의 앎은 역사적으로 고려할 때, 확고하게 옳다고 생각했던 믿음들도 틀린 것으로 수없이 판명되었다.

    다중우주에서의 죽음


    1) 나의 반복 가능성


    죽음이 큰 문제로 느껴지는 것은 죽음 이후에 영혼이 소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출생 이후 자신이 존재하기 시작하여 줄곧 이어져 오다,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고 본다. 나의 본질이자 동일성의 근거를 육체로 간주한다면 타당한 입장일 수 있지만 우리는 나의 본질을 '의식'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나는 매일 잠을 자고, 잠자는 동안에는 의식도 사라지고 없으므로, 살아있는 동안에도 내가 존재하지 않는 때가 있게 된다.
      
    나는 매일 어렵지 않게 나의 있음과 없음을 넘나든다. 그러나 죽음은 잠과 같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죽음은 유와 무를 넘나들던 내가 무로 넘어간 다음 유로 넘어오기 매우 힘들게 되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대신 나의 있음과 없음은 조건의 차이로 발생하는 것이라 이해한다면, 즉, 죽음은 잠에 비해 나의 있음으로 되돌아 올 조건 마련이 더 힘든 것이라 생각한다면 죽음 이후에도 다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 번 존재했음은 원리상 존재할 수 있음을 함축한다. 원리상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반복해서 존재할 수 있다.

    2) '죽음 이후는 무' 추론과 반박


    아무리 내가 반복해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원리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필요한 조건들이 다시 갖추어지지 않으면 반복해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나의 존재가 반복해서 존재할 수 없다면, 다음과 같은 추론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 전제 1: 나는 두뇌의 작용으로 나의 의식이 생긴다.
    * 전제 2: 내가 죽으면 나의 두뇌는 영원히 붕괴된다.
    * 결론: 내가 죽으면 나의 의식인 나는 영원히 소멸한다.

    이와 같은 추론은 뇌가 어떻게 의식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과학적으로 적절한 설명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전제 1, 2는 감각경험으로 도출된 판단이므로, 감각기관으로 경험되는 세계에서만 들어맞는다. 그런데 죽으면 그러한 감각기관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죽음 이후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해진다.

    물리주의에 따르면, 동일한 두뇌에서는 동일한 의식이 발생한다. 만약 나의 복제본이 있는 동시적 다중우주가 존재한다면, 다른 다중우주에 있는 복제본의 감각 경험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즉, 다중세계에 나의 복제본이 존재한다면 그는 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동시적 다중우주가 실재한다면 물리주의의 관점은 틀렸다.

    만약 시간적 다중우주가 존재한다면, 전제 2가 반박된다. 전제 2는 나의 두뇌와 똑같은 두뇌가 다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주장까지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적 다중우주에서 물질입자들이 나의 지금 두뇌와 같은 형태로 결합할 확률은 극도로 작긴 하지만 존재한다. 만약 시간적 다중우주에서 나의 지금 두뇌와 똑같은 두뇌가 다시 발생한다면, 나의 의식이 다시 발생하여 다시 존재할 수 있다.

    3) 유물론에서의 죽음 이후


    우주가 일회적이라고 가정되는 근거로, '엔트로피'와 '열 죽음'을 가정한다.
    열역학 2법칙에 따르면 우주의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한다. 그러다 엔트로피가 최대인 우주 공간에 희미한 열이 완전히 균일하게 퍼져 있는 열평형에 이르게 되면서 어떠한 흐름과 변화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열 죽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 죽음은 최소 수백억 년 이상이 지나야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는 경험할 수 없으며, 이 때는 이미 인류도 멸종하고 지구도 태양도 모두 사라진 이후일 것이다.

    '볼츠만'에 따르면 엔트로피의 열 죽음 상태에 이르다가도, 큰 열적 요동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우주가 탄생할 수 있다. 새로운 우주는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 출발하여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점점 엔트로피가 증대되다가 다시 열 죽음에 이른다. 즉, 전체 우주는 오랜 시간 간격을 두고 발생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다.

    만약 '볼츠만 우주'가 형성될 수 있다면, 같은 방법으로 자기가 우주 속에 있다고 착각하는 두뇌가 잠시 등장했다가 다시 사라지는 '볼츠만 두뇌'가 만들어질 수 있다. 볼츠만 두뇌는 볼츠만 우주보다 훨씬 쉽고 빈번하게 생성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들은 열 죽음 이후에 먼저 발생할 것은 볼츠만 우주보다는 볼츠만 두뇌이며, 지금 나도 실은 볼츠만 두뇌로서 우주 공간에서 둥둥 떠 있으면서 마치 실재하는 우주 속에서 신체를 갖고 살아간다고 착각하는 것이 된다.

    볼츠만 두뇌가 반복되다가, 나의 두뇌와 똑같은 두뇌가 만들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10의 10승의 50승 * 볼츠만 두뇌의 총 종류 수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볼츠만 우주는 10의 10승의 10승의 56승년의 시간을 거쳐 열 죽음에서 다시 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매우 황당하게 들리지만, 물리학에서는 아무리 기이하고 터무니없는 사건이라 해도 발생 확률이 0이 아니라면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고 가정한다.

    내가 다시 발생할 시간이 너무 길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 나의 죽음 이후 내가 다시 존재하기 까지의 시간은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 죽음과 같은 우주의 죽음으로 우울하게 느낄 필요 없으며, 더 나아가 나의 죽음의 두려움까지도 극복될 수 있다.

    4) 우주여행의 방법


    지구에서 우리 우주의 가장자리까지의 거리는 약 465억 광년이다. 
    우주선의 이동거리는 속도 * 시간으로 계산된다. 인류가 만든 우주선의 최고 속도는 보이저 1호의 초속 17km이지만, 이런 속도에도 우리 우주의 끝까지 가려면 약 800조 년을 가야 한다. 만약 빛의 속도의 99.99...%까지 우주선의 속도를 높여도, 여전히 465억 년 이상을 가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선의 속도 개선과 함께 탑승자의 수명 연장도 함께 시도해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인공동면, 기계몸 대체와 같은 방법이 고려된다.

    우주선의 속도와 탑승자 수명 늘리기에 한계가 있다면, 다중우주까지 질러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 중 한 방법으로 거론되는 것은 '웜홀'을 지름길로 이용하는 것이다. 웜홀은 우리 은하수 은하 내의 블랙홀과 다중우주의 블랙홀을 연결하는 것이다. 

    서로 얽혀 있는 두 양자라면 멀리 떨어진 다른 입자의 특성도 즉시 결정되는 '양자 얽힘 현상'을 이용하면 순간이동도 가능할 지 모른다. 현재 개별 양자 수준에서 실험은 성공했으나, 복잡하고 큰 물체를 이루는 무수한 양자를 동시에 착오 없이 순간이동 시키는 것은 웬만한 기술 발전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죽음을 통해 다중우주에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으며, 어떤 다중우주에 갈지 선택할 수도 없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다중우주 여행을 하는 것은 사용할 만한 방법이 아니다.

    5) 우주 대 죽음


    여러가지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죽음 이후는 영원한 무가 아닐 것이다.
    죽음 이후가 무가 안이라면 죽음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죽음과 우주는 인간의 앎을 넘어서 있어서 탁월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체험을 통해 죽음 이후의 삶을 희망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죽음을 희망으로 간주하는 사람을 마냥 불합리하다고만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유물론에서 본 삶의 의미


    1) 단일우주 유물론에서의 삶의 의미


    유물론적 관점에서 보면 우주는 객관적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우주의 객관적 의미로 파악한다면 인간의 삶 전체가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우주가 신의 영광이나 도덕적 이상과 같은 하나의 방향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자기의 욕구나 선호, 느낌에 근거해서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즉, 우주가 목적이 없기 때문에 각 개인이 제각각의 의미를 추구하는 기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개인들의 의미가 유한하고 불완전하더라도, 이러한 의미들을 계속 모아가다보면 언젠가 충분한 의미가 된다. 그러나 무의 상태에 놓이게 된 죽음으로 인해 의미에 장애물이 생긴다. 즉, 우리가 모을 수 있는 의미는 지금의 일생에서 누리는 것들이 전부이다.

    만약 죽음으로 더 이상의 의미 획득이 불가능하더라도, 한 번 사는 동안의 의미는 본래대로 누릴 수 있다. 어떤 노력으로도 죽음 이후의 삶이 영원한 무라고 한다면, 최대한 살아 있는 동안 만나는 의미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때의 의미들은 공허감이나 걱정에 물들지 않고, 진리, 좋음, 아름다움, 완벽함을 사랑해야 한다.

    지난 역사에 대해 '만약'을 가정하는 것은 내가 태어나지 못한 공통된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어떤 만약의 역사도 실제 역사보다 자신에게 더 좋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해서 바랐던 만약의 역사는 탄생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희박한 확률을 뚫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확률에 놀라움과 고마움을 표하고, 나의 존재가 우주의 기적임을 명심하면서 매순간을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태어남이 좋은 이유는 나에게 큰 이익이 되는 삶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전쟁과 학살 같은 수많은 범죄들로 얼룩져있다. 이러한 범죄가 없었으면 역사가 달라져 나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즉, 나의 탄생에 대해 마냥 감사만 하는 것은 나를 있게 한 역사상의 범죄들을 모두 외면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인류의 역사에서의 수많은 범죄는 나의 책임은 아니지만, 도덕적으로 고려했을 때 매우 꺼림칙한 일이다. 도덕적 관점에서는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가느냐이다.

    2) 다중우주 유물론에서의 삶의 의미


    다중우주에서는 언젠가 나의 두뇌와 같은 두뇌가 다시 발생하여, 나 역시 다시 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우주에서 생을 거듭하며 개인적, 주관적 의미를 누리다가 결국 더 이상의 의미를 바라게 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양의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

    사소한 우연이 삶의 행로를 크게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시간적 다중우주에서 내가 재탄생하더라도, 태어난 이후의 삶은 지금과 다를 것이다. 그러니 이번 삶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시간적 다중우주에서 반복될 나의 삶 모두가 역시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중우주를 간주한다면 만약의 역사, 혹은 후회의 감정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덜해질 수 있다. 내 선택에 의해 탄생을 박탈당하더라도 언젠가 다중우주에서 다시 태어날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내가 미치는 행위의 영향은 다중우주가 있든 없든 달라지지 않는다. 나의 행동이 어떤 사람을 태어나게 할 지 판단할 수 없는 것은 다중우주 유물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다중우주관을 전제하더라도,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함으로써 도덕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요원하다.

    다중우주를 전제한다면, 나의 탄생에 보다 떳떳해지고, 후회의 도덕적 악함 정도도 덜해질 수 있다. 대신 도덕적 판단과 행위를 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도덕적 의미 획득보단, 자기 행복과 관련된 의미를 잘 누릴 궁리를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곧 극단적 이기주의자나 악인처럼 행동하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도덕적 행위라고 여겨지는 행위를 해야 한다. 다만 그렇게 하는 이유를 도덕적 의미에서 찾기보단, 행복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내가 직접 기억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은 현재 우주에서의 의미뿐이다. 우리는 이 생에서 한정된 의미만을 누리며 그것을 기억할 수 있지만, 다중우주론을 가정한다면 여러 생을 통해 충분한 양의 의미들을 획득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가지론에서 본 삶의 의미


    1) 마땅한 세계관


    현대 과학이 축적한 우주에 대한 지식은 양적으로는 많아 보이지만, 비율로는 아주 낮다.
    이렇게 올바른 세계관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데 필요한 앎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타당한 입장은 불가지론이다. 즉, 현재 인식 능력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 유보의 상태로 남겨 두는 것이 진실에 부합한다.

    어떤 선택이든 하려면 특정 세계관이 전제되어야 한다. 세계관의 선택은 그 세계관이 옳은가를 기준으로 하지만, 가설적 세계관은 옳은 세계관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므로,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이 경우에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판단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보통 우리는 어떤 세계관을 이미 갖고 있다. 그러한 세계관은 다른 세계관들에 비해 나에게 큰 손해나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채택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관으로 바꾸는 것은 상당한 정신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가설적 세계관은 자신의 마음에 평정을 주는 세계관이다.

    2) 의미와 고통


    우주의 숨겨진 부분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만약 절대적 의미를 찾아 나서기 막막하다면, 쉽게 발견되는 의미를 추구하면 된다.

    어떤 세계관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나의 생이 죽음 이후에도 이어져 나갈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유한한 의미들을 모아서 충분한 의미에 이를 수 있다. 충분한 의미를 직접 체험할 수는 없더라도, 현재 의미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삶은 누릴 만한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고통과 괴로움도 있다. 다중우주에서 아무리 생을 거듭하더라도 이전 삶의 경험과 배움을 다음 생에 가져갈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매 생애마다 다시 무방비의 상태로 세상 속에 던져져야 한다.

    만약 삶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차라리 무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삶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가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는 것이라면 삶은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될 수 있다.

    고통이 무의미하지 않고, 어떤 충분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우주의 상당한 부분에 무지하듯이, 우주에서 만나는 고통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의 모든 것에 대해 잘 알 수 없다. 즉, 우리는 고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저 묵묵히 지켜보며 견뎌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