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책』은 소설인지 수필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특이한 서술로 이루어져있다.
주인공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는 평범한 회계 사무소에서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살고 있다. 소아르스는 리스본 시내와 테주 강변을 산책하며 사색하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끊임없이 기록한다. 이 책은 바로 소아르스가 저술한 그 기록지를 살펴보는 느낌으로 서술되어 있다.
"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앞 세대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신을 믿었듯이,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에 태어났다. 평생동안 글을 썼지만 주목받지 못했고,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명성을 얻게 되었다."
실제로 페소아는 리스본의 한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따라서 소아르스는 페소아의 '페르소나'라고 볼 수 있다. 페소아는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며, 수많은 셋방을 전전했고, 그 때의 경험들을 이명을 빌려 저술한 것이다.
전체적인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우울함과 공상, 꿈과 불안, 예민한 감성 등을 날카로운 필치로 풀어간다. '불안함'에 대한 내용을 저리도 다양한 문장으로 섬세하게 풀어가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평소 성격이 섬세하고 예민하며, 불안하고 감성적인 사람이라면 페소아의 문장들에 하나씩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다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초반부를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문장씩 필사하며 기록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완독하는데 힘이 들었던 책이었다. 끝없는 독백과 패배자로서의 읊조림은 퇴근 이후 침대 머리맡에서의 독서 시간을 괴롭게 만들었다. 그가 느꼈던 우울과 상심이 전해져서, 불안이 은밀히 전염되기까지 했다.
아래엔 책을 읽으며 인상깊었던 텍스트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밤이 오고 마차가 도착하리라. 나에게 주어진 산들바람을 즐기고, 그렇게 즐길 수 있도록 주어진 내 영혼을 즐길 뿐 더이상 묻지도 찾지도 않는다. 내가 여행객들의 책에 적은 글을 언젠가 다른 이들이 일고 나처럼 경치를 감상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면, 그 것으로 족하다. 만약 아무도 읽지 않거나 읽었으나 누구 하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해도 무방하다.
3.
이 모두가 지나가지만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고, 내 운명과 상관이 없으며, 심지어 운명 자체와도 상관없다. 단지 무의식일 뿐이고 우연히 날아온 돌을 맞고 튀어나온 불평, 이해 못할 목소리들의 메아리, 인생의 복합적인 뒤섞임일 뿐이다.
14.
완성을 미루고만 있는 우리의 작품이 형편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예 시작하지도 않은 작품은 그보다 더 형편없다. 무엇인가를 만든다면 적어도 남아는 있게 된다. 초라하지만 그래도 존재한다. 다리를 저는 내 이웃의 정원에 놓인 하나뿐인 화분에 핀 조그마한 식물처럼. 그 화분은 내 이웃에게 기쁨을 주며, 때로는 나에게도 즐거움을 준다. 내가 쓰는 글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의 글 덕분에 상처받은 슬픈 영혼이 잠시 시름을 잊을 수도 있으리라. 그것으로 충분하고, 혹시 충분하지 않다 해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 인생사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
38.
모든 사람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모든 불가능한 것들 중에서 가장 불가능하게 여겨지므로 날마다 열망하는 것이고, 슬픈 순간마다 체념하는 것이다.
64.
지금 비록 불완전한 내 글을 보며 나는 눈물을 흘리지만, 먼 훗날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다면 내가 이룰 수도 있었을 완벽함이 아니라 이 눈물에 더 감동받을 것이다. 완벽한 글을 쓸 수 있었다면 울지 않았겠지만 더 이상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완벽은 결코 구현되지 않는다. 성인들도 눈물을 흘리고, 그래서 인간이다. 신은 침묵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은 사랑할 수 있지만 신은 사랑할 수 없다.
83.
갑자기 깨닫거니와 나는 세상에서 혼자다. 영혼의 지붕 위에 올라가서 이 모든 것을 본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다. 본다는 것은 멀리 있다는 것이다. 분명하게 본다는 것은 멈추는 것이다. 분석한다는 것은 외부인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스치지도 않고 지나간다. 내 주위에는 공기뿐이다. 나는 어찌나 철저히 혼자인지 나와 내 옷 사이의 거리마저 느낄 수 있다.
100.
나는 항상 현재에 산다. 미래는 알지 못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모든 것의 가능성이라서 부담스럽고,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라 부담스럽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과거에 대한 그리움도 없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은 너무나 자주, 아주 철저히, 내가 원했던 바와는 정반대였다.
152.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실이기에 다들 스스로를 잃어버리며 산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기쁨 없이 나를 잃어버린다. 나의 상실은 알 수 없는 운명으로 태어나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파도가 높이 몰아쳤을 때 바닷가에 생겼다가 다시는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는 물웅덩이 같다.
169.
지금까지 쓴 모든 글을 한 문장, 한 문장씩 천천히 맑은 정신으로 다시 읽는다. 그러면서 전부 다 헛소리이고, 차라리 쓰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문장이든 제국이든 일단 성취된 것들은 이미 성취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물의 가장 나쁜 면, 즉 부패로 접어들게 된다.
191.
때때로 나는 서글프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언젠가 내가 더이상 살아 있지 않은 미래에, 지금 내가 쓰는 이 글들이 찬사를 받는 날이 오고, 마침내 나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진정한 가족들 사이에서 태어나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나기 한참 전에 나는 이미 죽어 있을 것이다. 죽은 자가 살았을 때 겪었던 냉대를 애정이 보상해줄 수 없을 때, 나는 단지 우표 속 초상으로 이해될 것이다.
251.
인생에 대한 이론을 세우지 않는다. 인생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고 궁금하지도 않다. 내가 보기에 인생은 대체로 고단하고 슬프며, 그 중간중간에 달콤한 꿈들이 들어 있다. 다른 이들의 인생이 어떤지는 모른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다른 이들이 인생이 나에게 소용 있는 경우는, 그들 각자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은 인생을 나의 꿈속에서 살아볼 때뿐이다.
283.
자유란 고립을 견디는 능력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 수 있다면, 즉 돈이나 친교, 또는 사랑이나 명예, 호기심 등 조용히 혼자서 만족시킬 수 없는 욕구들을 해결하려고 다른 사람들을 찾지 않을 수 있다면, 당신은 자유롭다.
350.
시간이란 무엇인지 모르겠다. 시간을 재는 정확한 척도가 무엇인지,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 시계로 시간을 잰다는 건 외부에서 시간을 공간으로 나누는 것이므로 가짜다. 감정으로 시간을 잰다는 건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느끼는 감각을 재는 것이므로 역시 가짜다. 꿈에서 시간을 재는 것 역시 잘못됐다. 꿈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급하게 시간을 스칠 뿐이고, 성격을 파악할 수 없는 흐름 속의 무언가로 인해 바쁘거나 느리게 산다.
399.
나는 한번도 활동적인 삶을 영위하는 능력을 지녀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실수하지 않는 동작에서 나는 매번 실수했고, 다른 이들은 자연스럽게 할 줄 아는 일을 하기 위해 나는 늘 노력해야 했다. 다른 이들은 원치 않는데도 얻는 것들을 얻기 위해 나는 간절히 소망했다. 인생과 나 사이에는 항상 반투명 유리가 있었다. 그 유리는 보거나 만져봐도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나는 그 인생 또는 계획을 살지 못했다.
406.
행복을 인식하지 않으면 행복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행복의 인식은 곧 불행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행복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 행복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과 이제 곧 행복을 뒤에 남겨놓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429.
나는 항상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얻고 싶었다. 누가 나를 무심하게 대할 때마다 상처받곤 했다. 행운이 버린 고아인 나에게는, 다른 모든 고아들이 그렇듯, 누군가의 애정을 받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이 욕구를 채우고 싶었고, 늘 허기에 시달렸다. 그 피할 수 없는 허기에 어찌나 익숙한지 가끔 내게 식욕이 있기는 한가 궁금할 정도다.
481.
그리움! 심지어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람들과 사물들에까지 그리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시간이 도망가버려 고통스럽고, 삶의 불가사의가 아프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찾는 장소에서 일상적으로 마주치던 사람들, 그들을 못 보게 된다면 나는 슬플 것이다. 그들은 그저 모든 삶의 상징이었을 뿐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