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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구토』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여과하며, 마주하는 대상에 대해 시종일관 우울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을 때와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


"나의 시체도 쓸데없고, 이 플라타너스들 사이, 이 미소 짓는 공원 안쪽의 자갈밭에 뿌려질 피도 쓸데없을 터였다. 그리고 벌레들이 파먹을 살도 그것을 받아들일 땅속에서 쓸데없고, 마지막으로 껍질이 벗겨지고 닦여 이빨처럼 깨끗하고 깔끔해질 내 뼈들도 쓸데없을 것이었다. 나는 영원히 쓸데없었다."

극의 흐름을 이끄는 갈등이나 특별한 사건도 없고, 독백체의 문장에, 문단도 나열식으로 되어 있어서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정신을 살짝 빼놓고 읽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때 읽는다면,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알기 쉽지 않다. 매 문장을 곱씹어보고, 주인공인 앙투안 로캉탱의 은밀한 사고 흐름에 따라 상상해가며 읽어야만 몰입할 수 있다.

줄거리


앙투안 로캉탱은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면서, '롤르봉 후작'에 대한 연구 및 저술을 마치기 위해 '부빌'에 머무르고 있다. 단골 카페도 있고, 종종 잠자리를 갖는 사람도 있지만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모습에서 고독함이 보인다.

고독한 일상 속에서 로캉탱은 문득 '구토 증상'을 느낀다. 구토 증상은 나날이 심해지면서 익숙하게 느껴졌던 이 세계 전체가 '구토'로 느껴지게 되었다. 로캉탱은 구토와 관련된 현상들을 기록한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당연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실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존재의 우연성. 그동안 '존재'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조차 모른 채, 너무나 당연하게 존재한다고 여겨왔던 것이다.


"핵심은 우연성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정의상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여기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나타나고, 누군가와 마주치게 되지만, 결코 연역될 수 없다."


급기야는 '롤르봉 후작'에 대한 연구를 포기해버리고, 부빌에서 그나마 인연을 맺고 있던 도서관의 '독학자'와도 관계가 소원해진다. 로캉탱은 옛 연인이던 '안니'의 편지에서 재회를 암시하는 말을 접하고, 그녀와 다시 만날 날만을 학수고대하며 보낸다. 그리고 만남의 날이 되자, 상황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안니와의 교제는 로캉탱에겐 '완벽한 순간'으로 남겨져 있었으나, 다시 만난 안니는 뚱뚱해져있으며 과거에 함몰되어 있었다. 그녀는 만나는 남자가 여럿 있는 것으로 보이며, 로캉탱의 생각과는 달리 만남을 지속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다음 날, 불안해진 로캉탱은 그녀가 떠나는 기차역까지 달려가본다. 그러나 안니는 로캉탱의 모습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면서, 새로운 남자와 함께 기차를 타고 떠나버린다. 그렇게 로캉탱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로캉탱은 마지막으로 독학자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장면은 남학생의 몸을 만지는 독학자의 모습이었다. 독학자의 위선에 치를 떨었던 그였지만, "너도 호모냐?"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독학자를 돕게 된다. 독학자를 치료해주기 위해 약국에 함께 가려 했지만, 독학자는 자신을 혼자 있게 해달라며 석양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또 다시 혼자가 된 로캉탱.
부빌을 떠나기전 마지막으로 단골 카페인 '랑데부 데 슈미노'에 들린다. 그리고 'Some of these days'를 들으면서 음악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생각을 마친 그는 '한 권의 소설'을 저술할 것이라는 결심을 한다.

자신이 음악을 통해 고독과 권태로부터 위안을 얻은 것처럼, 미래의 독자가 자신의 소설을 통해 위안을 얻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로캉탱은 우연히 주어진 존재의 부조리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