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은 학생과 직장인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사람이 커피를 마신다. 현대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성인 한 명이 1년간 마시는 커피는 353잔으로 집계됐다.(세계 평균은 132잔이다.)
커피를 아예 마시지 않는 사람과 간혹 먹지 않는 날도 있기 때문에 하루에 1~2잔은 꾸준히 먹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커피 시장 규모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이고, 카페에 사용하는 돈도 연간 10만 4천원에 이른다.
어느새 커피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커피를 마시며 잠을 깨고, 피로를 씻으며 업무에 임하고 있다.
커피의 보급은 지친 현대인들의 업무 촉진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인권'의 형성에도 기여했다.
커피는 어디서 기원했고, 어떻게 전세계로 확산될 수 있었을까?
어떤 이유로 커피가 인권이라는 개념의 형성에 기여하게 되었을까?
커피의 기원
전설에 따르면, 커피는 오늘날 에티오피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옛날 에티오피아에는 '칼디(Kaldi)'라는 이름의 염소지기가 살았다. 그는 염소를 데리고 산기슭 구석구석을 훑으며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어느 날 오후, 칼디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피리를 불어 염소를 불러모으려고 했다. 그러나 피리를 힘껏 불어도 염소는 칼디에게 도통 오지 않았다. 조바심이 난 칼디는 귀를 쫑긋 세우고, 염소들의 소리에 집중했다. 염소 울음소리를 따라간 칼디는 염소들이 이상한 빨간 열매를 뜯어먹고,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칼디는 염소들이 독이 든 열매를 먹었다면서 걱정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염소는 몇 시간이 지나도 무사했지만, 다음 날에도 같은 장소에서 빨간 열매를 먹고 춤을 췄다. 호기심이 난 칼디는 염소가 먹는 열매를 따서 씹어먹어보았다. 열매의 맛은 무척 쌉싸름했으며, 단맛이 나는 듯 하더니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칼디는 왠지 모르게 무척 신이 났고, 피곤함을 잊은 채 염소들과 함께 춤을 추며 뛰어다녔다. 칼디는 수도원의 수사에게 자신이 발견한 신비한 나무와 그 열매에 관해 이야기했다. 곧 마을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내 에티오피아의 문화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자리잡았다.
처음에는 에티오피아인들은 이 신비한 열매를 단순히 씹어서 섭취했다. 시간이 흐르고, 이 열매를 더욱 맛 좋게 먹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들은 차를 마시듯이 잎과 열매를 뜨거운 물에 끓여먹고, 생두를 갈아서 고기나 음료와 함께 먹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커피의 기원이었다.
에티오피아에서 널리 알려진 음료가 된 커피는 전쟁과 무역을 통해서 인근 지역에 점차 확산되었다. 에티오피아는 인근 지역인 예멘과 교역을 활발하게 나누면서, 커피와 다양한 물자들을 서로 교환했다.
처음 커피는 아라비아의 수도승들이 졸지 않고 밤새 기도하기 위한 용도로 마셨다. 술을 금지하는 이슬람 지역에는 술을 대체할 음료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커피였다. 커피의 맛과 향은 점차 종교적 의식을 넘어서게 되었고, 부자들은 커피방을 만들어 따로 향유하는 일종의 문화가 되었다.
1536년, 오스만 제국은 예멘을 점령하고, 커피의 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당시 커피를 수출하는 항구 이름이 '모카(Mocha)'였는데, 커피가 모카라고 불릴만큼 그 위세는 대단했다.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교 순례자들을 통해 페르시아, 이집트, 터키, 북아프리카와 같은 이슬람 세계 전역에 소개됐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음료를 '카와'라고 불렀다. 카와라는 이름은 오스만 제국의 페르시아어로 '카흐베'로 발음됐다. 그리고 카흐베를 마시는 곳은 '카흐베하네(커피하우스)'로 불려지게 됐다.
오스만 제국의 위세와 더불어, 이슬람 지역의 커피는 어디에서나 카흐베하네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대중화됐다.
십자군 전쟁과 교류, 무역 등으로 인해 16세기 후반에는 카흐베가 유럽에까지 전파됐다. 유럽인들은 숯처럼 시커멓고, 맛도 텁텁한 이 음료를 어떻게 다뤄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심지어 기독교 문화의 유럽에선 이슬람교의 중동과 종교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커피를 악마의 음료로 취급했다.
당시 미식가였던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우연히 무슬림들이 즐기는 이 악마의 음료를 접하게 됐다. 커피를 마신 그는 감탄을 터트렸고, 이 맛있는 음료를 이교도들만 마시는 것에 통탄했다. 사탄의 음료를 당당하게 마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클레멘스 8세는 커피에 '세례'를 내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클레멘스 8세의 '커피 세례'로 인해 유럽에 커피가 본격적으로 상륙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당시 유럽의 물은 석회질이 많아, 품질이 떨어져 생수를 마시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대신, 포도주가 예수의 피라는 기독교 사상에 근거하여, 물처럼 포도주를 마시다보니 거리에 알코올 중독자가 즐비했다. 알코올 중독자가 넘쳐나는 당시 유럽의 거리에 커피를 마시는 장소인 '카흐베하네'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카흐베하네가 하나씩 문을 열면서, 온종일 술만 마시던 유럽인들은 커피를 마시고 점차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커피와 인권
커피는 유럽에서 금세 대중적인 음료가 됐다. 추정치에 따르면, 1700년 무렵에는 런던에 문을 연 '커피하우스'만 하더라도 2천개가 넘었다고 한다. 커피하우스는 커피 한 잔값인 1페니만 지불하면, 몇 시간이나 죽치고 앉아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교양있는 사람들은 모두 커피하우스에 모여서 지적인 대화를 나눴다. 특히 1686년, 프랑스 국립 극장 근처에 자리잡은 '카페 르 프로코프'는 수많은 철학자들과 작가들이 상주했다. 학식이 높았지만 타고난 신분에 의해 출세가 제한되있었던 신종 계급 '부르주아'는 커피하우스에서 자주 불만을 토로했다.
커피의 각성 효과로 뇌가 활성화된 당대의 지식인들은 귀족에 대한 불만을 피력하고, 자신이 가진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그들의 불만은 '콩도르세', '볼테르'와 같은 뛰어난 사상가와 작가들이 문자를 통해 구체적으로 체계화시켰다. 즉, 부르주아들이 지닌 기존의 신분제에 대한 불만을 세련된 문장으로 다듬은 사상이 바로 '인권'이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형성된 인권이라는 개념은 곧 프랑스 혁명의 발생으로 연결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기존의 봉권 질서를 타파했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적인 가치를 널리 공표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통해 인권 사상은 전 유럽과 서구 사회로까지 전파되었다.
다시 말해, 유럽 사람들은 커피를 통해 술에서 깨어났고, 이성을 각성함으로써, '자유와 평등'이라는 권리를 확보해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