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실체가 분명치 않지만, 메타버스와 같은 가상현실이 연일 화두에 오르고 있다.
미래의 인류는 실제 세상을 넘어, 메타버스에서 살게 될 것인가?
메타버스에서의 경험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유의미한 것인가?
'로버트 노직'은 그의 저서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에서 '경험 기계(Experience Machine)'라는 사고실험을 제시한다. 이 사고실험을 통해 메타버스의 미래를 짐작해볼 수 있을 듯 하다.
경험 기계(Experience Machine)
"그대가 원하는 그 어떤 경험이라도 마련해 줄 경험 기계(Experience Machine)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대의 두뇌엔 전극이 연결되어 있고, 그대의 몸은 경험 기계에 연결되어 있다. 그대의 생애의 체험들이 모두 미리 처리되어 그대의 뇌에 심어진 채, 탁월한 신경 심리학자들이 그대의 두뇌를 자극하여 그대가 마치 위대한 소설을 쓰거나, 친구를 사귀거나, 또는 흥미 있는 책을 읽고 있듯이 생각하고 기쁨을 느끼게 만들 수 있게 한다. 경험 기계에서는 내가 꿈꾸는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대는 이 경험 기계에 평생 연결되어 있기 원하겠는가?"
경험 기계에 연결되는 순간은 잠깐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경험 기계 속에 있는 동안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경험 기계의 가상 현실 속에서 사용자가 원하는 세계를 구축하고, 지식의 축적도 가능하다.
경험 기계는 2년 동안 지속되며, 2년이 지난 뒤에 다시 경험 기계에 들어갈 지 결정하게 된다.
경험 기계(Experience Machine)의 의미
노직은 직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스스로 경험 기계에 들어갈 사람은 없다고 파악한다.
그러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어떤 행위를 경험하는 것 보다, 직접 하고 싶어한다.
2) 우리는 무규정의 형체 없는 덩어리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되고자 한다.
3) 경험 기계의 세계는 인간이 구축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은 세계에 제한된다.
경험 기계를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환각제'를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다.
경험 기계를 상상해봄으로써 경험 이외에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경험 기계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려는 우리의 욕구 그 자체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경험 기계는 연결된 사람에게 필요한 경험만을 제공하지, 그 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즉, 경험 기계에서 겪는 행복과 쾌락들은 '가짜'이기 때문에 '진짜'에서 인정받는 것이 훨씬 가치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 기계에서의 행복과 쾌락을 가짜라고만 폄하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볼 점
일론 머스크는 '뉴럴 링크'를 통해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처럼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BCI 기술도 점차 개발되고 있으며, 현대인들이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듯이 가까운 미래에는 누구나 머리에 컴퓨터 칩 하나 정도는 심고 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경험 기계와 관련된 논의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온라인 게임 상의 내 캐릭터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나는 온라인 게임이 나의 인생에 즐거움 이상의 어떠한 가치도 주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물론 일부 사람은 아이템을 현금으로 판매하여 나름의 가치를 실현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를 가정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속 세상에 몰입한다.
우리는 온라인 게임이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가상현실 속 내 캐릭터를 강하게 만들고, 사람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소통한다. 그러나 노직이 이야기한 것 처럼, 온라인 게임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의 경험들은 정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일까?
수업 시간에 경험 기계를 설명해주고, 여기에 들어갈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노직의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현실이 힘드니까, 이런 것이라도 들어가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부모님이랑 같이 들어가면,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할 수 있어요."
"경험 기계 안에서는 가상 현실인지 모르기 때문에 현실처럼 살 수 있어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참신한 답변들이 쏟아져 나왔다.
현실 세계가 경쟁도 없고,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다면 아무도 경험 기계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나브로 온라인 게임에 중독되듯이, 당장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그곳이 비록 가상 현실이라도 기꺼이 들어갈 사람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니 인생의 목적을 감각적 쾌락이라고 규정하는 유물론자가 있다면 그들의 생각을 함부로 비난할 수 없듯이, 경험 기계에 들어가거나 온라인 게임에 빠져사는 사람들을 마냥 비판할 수 없지 않을까?
현실이 너무 힘들다면, 비록 가짜더라도 마음 놓고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직장인들이 무척 힘든 하루를 보내고 술 한 잔에 털어넘기듯이. 일시적인 감각적 쾌락과 같은 착각이더라도 이러한 행위조차 무의미하다고 재단해버리면, 우리는 그저 평생 효율만을 쫓으며 일만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온라인 게임, 인터넷 커뮤니티, 음주에 몰입하는 것 등은 경험 기계에 들어가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이와 유사한 것들 중 어떤 것도 즐기지 않는 현대인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곳이 실제 세상이든, 가상 세계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이다. 신경 과학에 따르면, 행복과 쾌락은 모두 뇌의 화학 작용에서 비롯된다. 행복이 뇌의 감각과 관련되있다면, 수단과 방법이야 어떻든 행복감을 느끼고 쾌락을 향유할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경험 기계에 들어가는 것이 마냥 나쁜 선택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