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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자료]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



    일반적으로 결혼이란 성숙한 성인이 애정을 바탕으로 서로의 인생을 공유하고 책임지는 공식적인 사회적 관계라고 정의된다. 다양한 문화와 법률 체계에 따라 결혼의 형태는 여럿 있지만, 대부분 법적 절차와 의식적인 축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과거에는 충분히 성장한 성인 남녀라면 당연히 결혼을 하는 것이라고 간주되어 왔지만, 현대 사회에는 점점 결혼이 필수라는 의식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2022년도 혼인 건수는 1970년 통계 작성을 시작한 이내로 가장 낮게 집계되었다. 이와 같은 원인으로 개인주의적 가치관, 경제적 독립, 다양한 사회적 관계의 증대 등이 지적되고 있다. 사실 결혼 생활은 마냥 낭만적이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결혼 생활은 필연적으로 수십 년간 다르게 살아온 두 인격체가 삶을 공유한다는 어려움과 강한 감정적인 연결을 경험하면서 다양한 외부의 요인과 압력을 겪게 된다.

    결혼의 목적은 무엇일까? 결혼을 통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지금부터 약 100여 년전, 두 명의 젊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시도한 특이한 결혼 형태에 대해 알아보자. 그리고 이를 토대로 결혼의 진정한 의미에 관해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1905년 생으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1살 때 아버지를 여위었고, 의붓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4살 때 걸린 독감 후유증으로 오른쪽 눈이 사시가 되었다. 사르트르는 158cm의 작은 키를 지녔지만, 동시대의 누구보다도 총명했다. 훗날 그는 작가로 크게 성공하여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겼고, 사상적으로도 널리 인정을 받았다.(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받았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기존의 서구 사회가 믿어왔던 신과 이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붕괴되었다. 세계 대전이 이루어지던 20세기는 광기와 억압, 파괴와 학살이 평범한 일상에 도사리고 있었다. 끔찍한 전쟁의 잔상으로 인해 언제까지나 인류가 긍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신뢰는 무참히 파괴되었다. 이에 따라 현대인들은 신과 이성이라는 구심점을 잃게 되었고, 더 이상 누구에게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실존주의'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대 배경에 근거하여 등장했다.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장하며, 진정한 자기 자신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물건은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지기 때문에 정해진 목적이 있지만,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므로 정해진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 하나하나에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무한한 자유는 자신의 모든 행위에 책임져야 된다는 근원적인 공포와 고독, 절망을 불러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의 행동을 결단하고 책임짐으로써 진정한 실존을 회복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1908년 생으로, 여유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세계 대전의 여파로 파산하여 생계에 어려움을 겪으며 자랐다. 그녀는 키가 크고 몸매가 날씬했기에 인기가 많았으며, 불같은 열정과 뛰어난 지성을 동시에 갖춘 비범함을 보였다. 보부아르의 아버지는 아들을 갖고 싶어했지만 야속하게도 두 딸을 낳았다. 그는 보부아르의 훌륭한 지적 능력을 일찍이 파악하고, 보부아르가 '남자의 두뇌'를 갖고 있다며 학업 활동을 지지해주었다.

    보부아르는 여성 인권 신장과 관련된 진보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그녀는 '제2의 성'이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여성 해방을 주장했다. 당대 서구 사회에서 여성의 덕목은 결혼하여 남편에게 종속된 삶을 사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여겼다. 즉, 여성의 타고난 능력과 상관없이 여성들은 오로지 출산, 육아, 가사 노동에만 전념해야 하며, 남성들에게 순종적으로 대할 것을 강요받았다. 보부아르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각종 철학, 심리학, 신학, 인류학 등을 기반으로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여성의 존재 의미를 새롭게 규정했다.

    보부아르는 '여성다움'이라는 관념은 가부장적인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파악했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정신적으로 동등하게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에게 예속됨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비주체적인 타자로 규정된다고 비판했다. 이를 극복하여 여성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여성 스스로의 권리 투쟁과 경제적 독립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여성들은 기꺼이 남성적 가치들을 접수하고, 남성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위하고 노동하고 활동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사상적 공통점은 '자유'이다.

    인간은 자유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인 '사랑'도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술하겠지만,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주체성'과 '자유'라는 자신들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계약 결혼'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들이 본격적으로 교제하기 시작한 것은 조금 더 뒤의 일이다.

    카스토르(Castor)



    당시 보부아르는 '소르본 대학교(Sorbonne Université)'를 다니고 있었고, 사르트르는 '그랑제콜(Grandes écoles)'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소르본 대학교도 프랑스의 명문 국립 대학교지만, 그랑제콜은 프랑스의 엘리트 양성 교육기관으로 소수 정예의 학생들만 선발했기에 수준 차이가 있었다. 그랑제콜은 단과 대학처럼 운영되기 때문에 모든 학과나 수업을 커버할 수 없어서, 간혹 소르본 대학교에서 수업을 들어야 될 때가 있었다. 이 때문에 그랑제콜 출신들은 종종 소르본 대학 출신들을 무시하곤 했다.

    사르트르는 '폴 니장'과 '마외'와 함께 그랑제콜에서 수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3인방'으로 불릴만큼 함께 모여다니면서 다른 학생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시하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3인방은 학교 교칙을 의도적으로 어기고, 마음에 드는 교수의 강의만 들었으며, 서로만 아는 암호를 만들어 자기들끼리만 소통했다.

    그 중 '마외'는 소르본 대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우연히 보부아르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이후 도서관 옆자리에 앉아 함께 공부를 하고, 식사도 함께했다. 마외는 유부남이었으나 보부아르에게 지속적으로 호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당시 보부아르는 사촌오빠와의 결혼을 약속했기 때문에 마외의 마음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마외는 보부아르가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공부와 집필 활동만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마치 항상 안절부절하며 댐을 지으려는 비버와 같다고 놀리곤 했다. 이는 보부아르(Beauvoir)의 영어 발음과 비버(Beaver)의 발음이 비슷해서 지은 언어유희였다. 이 때 비버에 해당하는 프랑스어가 '카스토르(Castor)'인데, 이것은 훗날 사르트르가 보부아르를 부르는 애칭이 된다.

    마외와의 친분으로 인해 보부아르는 폴 니장과 사르트르를 만나게 된다.
    당시 사르트르는 1급 교원자격시험에 낙방하여, 약혼자와 파혼하고 재수를 하고 있었다. 보부아르를 본 사르트르는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고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는 보부아르의 논문 주제였던 사상가 라이프니츠에 영감을 얻어, '라이프니츠와 목욕하는 미녀들'을 그린 데셍을 선물했다.(미녀들은 라이프니츠의 주요 사상인 '모나드'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보부아르는 마외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데이트 장소에 자신 대신 동생 엘렌느를 보내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본격적인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대비하여, 보부아르는 3인방과 함께 토론하며 학업에 매진했다. 수많은 철학적 논쟁이 오가는 동안 사르트르는 한 번도 토론에서 밀리지 않았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지식 수준에 깊이 감명받고, 그의 재능과 학식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그 해의 교원자격시험은 사르트르가 수석, 보부아르가 차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마침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변호사였던 보부아르의 아버지는 사르트르가 키도 작고 못생겼으며,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무척 못마땅해했다. 그러자 사르트르는 함께 루브르 박물관에 놀러간 1929년 봄, 루브르의 안마당 벤치에서 계약 결혼을 제안했다.

    계약 결혼



    사르트르가 제시한 계약 결혼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지키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허락한다.
    2.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숨기지 않아야 한다.
    3. 경제적으로 서로 독립하여, 별도로 생활한다.

    보부아르가 해당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계약 결혼은 성립되었으나, 이들의 계약 결혼은 성적으로 개방적인 프랑스 사회에서도 문란하고 부도덕하다고 비판받았다. 특히 첫 번째 조건에 따르면, 계약 결혼 중에서도 다른 파트너를 만나는 것을 허용할 정도였으니 이런 비판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사랑'은 각자의 주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관계에서 온다고 간주했다. 즉, 자신과 타인의 구분에서 벗어나, 서로의 욕망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순수한 자유의지를 인정해주는 것만이 진정한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계약 결혼 기간 중에서도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다른 사람과 숱한 관계를 맺었다. 심지어 이들은 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삼각 관계에 빠지기도 하고, 질투에 휩싸여 크게 다투기도 했으며, 계약 결혼이 파기되기 직전까지 가서 다른 사람과 결혼할 뻔한 적도 있었다.

    사르트르는 여러 여자와 자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면서, 수많은 사람과 성적 파트너 관계를 유지했다. 이에 보복하듯이 보부아르도 맞바람을 피우고, 자신의 첫 장편소설 '초대받은 여자'에서 사르트르의 파트너를 죽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부아르의 제자들과도 육체적 관계를 가졌다. 심지어 그의 애인 중 한 명을 딸로 입양하여, 작품 저작권까지도 건네주기도 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한 번도 속이지 않고 계약 결혼의 조건을 준수하며, 
    보부아르에게 대화와 편지 등으로 새로 사귄 여성들을 낱낱이 알려주었다.


    보부아르가 무엇보다도 힘들어했던 것은 사르트르의 바람기가 아니라, 그녀의 맞바람 사실을 보고도 무관심하고 냉담한 태도를 보였던 사르트르의 모습이었다. 그러던 중, 보부아르는 미국에서 강연을 하다가 미국의 소설가 '넬슨 엘그렌'에게 한 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보부아르는 엘그렌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인 면 모두 만족하여, 지금까지 고수해 온 자신의 페미니즘 신념을 모두 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엘그렌에게 전통적인 아내와 같이 모범적으로 순종할 것임을 맹세했고, 엘그렌을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에 술에 잔뜩 취해 벽에 머리를 찧기도 했다.


    엘그렌과 보부아르의 관계는 무려 17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엘그렌은 보부아르에게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와서 자신과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사르트르를 포기할 수 없었고, 결국 사르트르를 선택하게 된다. 이후 엘그렌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만, 도박과 경마 등으로 세월을 낭비하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단순한 파트너이자 동지가 아니였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운명의 동반자였으며, 창작의 활력소이자, 영혼의 결합 그 자체였다. 그들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힘이 되었으며,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더라도 결국 그들은 서로에게 다시 돌아왔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인생의 협력자였던 것이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은 2년마다 갱신되면서, 1929년부터 죽을 때까지 약 50여 년간 유지되었다. 그들은 따로 살면서 서로가 성적 파트너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날짜와 약속 시간만큼은 한 번도 어기지 않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정신적 결합은 완전함에 가까웠다. 그들은 서로의 집필 과정을 검토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서로의 사상을 완성해주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서로를 가리키며 "나의 지적 검열관"이라고 평가했다.


    사르트르는 1970년대에 이르자 점점 시력과 건강을 잃어갔다. 결국 그는 1980년 4월 15일에 지병이었던 폐기종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사르트르가 죽은 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음에 크게 절망하며 슬퍼했다. 이후 그녀는 '작별의 의식'이라는 책으로 결혼 생활 마지막 10년의 일상을 회고했다. 이후 보부아르도 1986년에 타계하며, 사르트르와 함께 몽파르나스의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은 서구 사회에 큰 영감을 주었다.

    그들의 계약 결혼은 자유와 권리, 성적 해방, 인간 존엄성과 같은 주제와 관련하여 직접 행동하고 실천하며 스스로를 증명했다. 그들은 계약 결혼을 통해 느꼈던 수많은 감정과 사상들을 여러 작품으로 표현함으로써 현대적인 가치관을 제시했다. 또한 전통적인 결혼관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 성적 자기 결정권과 새로운 개방적인 형태의 결혼을 받아들이는게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