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전달하는 교사로서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보다 쉬운 말로 설명하는 것은 끝없는 고민의 연속이다. 전문적으로 학문에 종사하진 않지만, 끊임없이 업데이트 되는 지식을 수용해야만 수업의 질도 올라갈 수 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주어진 내용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주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정리하고 저술해보고 싶어졌다. 일단은 블로그로 글쓰기를 시작하고 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전문적인 공부를 하면서 학위도 따고 학술 논문도 기재하고 싶다.
과거엔 과제로 리포트를 작성할 때는 글쓰기가 고역이라고 느껴졌는데, 지금은 글쓰기가 무척 재미있다. 어떤 단어와 문장을 사용할 지, 독자 입장에서 글을 읽을 때 적절한 리듬감이 느껴지는지, 혹은 읽기에 너무 난해하지는 않는지 등 나름대로 다양한 면을 고려하여 한 글자씩 적어나가고 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글쓰기가 익숙해지자, 문장력이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 것이 느껴져서 무척 고민스러웠다. 유명한 책을 읽어보며 그들의 문체를 모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근본적으로 문장을 구성하는 방법론 자체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었다.
이 책은 '논문'을 주제로 하곤 있지만, 소위 말해 모든 '비문학 저술 활동'에 포함되는 조언을 해주고 있다. 블로그에 작성하는 글, 보고서, 강연 연설문 등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분야의 산문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내용이 수록되어있다. 저자는 수많은 저술 활동을 통해 직접 느낀 글쓰기의 노하우를 생생한 예시를 통해서 전수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글쓰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식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과정도 엿볼 수 있다. 비록 1959년에 작성된 일본인의 글이지만, 본 서적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시대를 초월한 글쓰기의 기본 개념을 다루고 있으므로 지금보아도 충분히 얻을 것이 많을 것이다.
"문장을 만드는 것은 사상을 만드는 것이며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단문에서 시작하자
내용을 자신의 정신에 새겨둘 하나의 방법은 읽고 이해한 내용을 자신의 손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읽는 인간에서 쓰는 인간으로 변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인간이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태도를 바꾼다는 말이다.
쓰고자 하는 자세일 때 정신적 긴장은 비약적으로 증대된다. 이 엄청난 긴장 속에서 인간들은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상 깊숙이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정신 안쪽 깊이 들어갈 수 있다.
표현이라는 우회로를 거침으로써 우리들은 진정으로 서적을 읽고 그 내용을 자신의 정신에 깊이 새길 수 있다. 단문이라는 괴롭고 좁은 장소로 자신을 밀어 넣음으로써 글을 쓴다는 일의 기초적 작업을 배울 수 있다. '단문'이라는 부속품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조합함으로써 '긴 글'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기계를 만들어낸다.
처음에 주제를 정한다. 문제를 설정할 때는 떠오른 이미지를 소중히 하며 종이에 분명히 써둔다. 이러한 관념과 착상을 소중히 여기면서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책 등을 통해 잘 조사한다. 이런 과정에서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관념이나 착상이 마음 속에 떠오르며, 맨 처음 이미지가 변화되어간다. 이와 같은 이미지와 관념 사이의 상호 컨트롤이 몇 번이나 반복되면서 긴 글을 조립하는 데 과부족하지 않은 여러 단문들이 완성된다. 왕복 교통이 충분히 행해졌으면 마지막 조립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긴 글의 전제로서의 단문이라는 것은 회화에서의 작은 데생과 같다. 많은 데생을 연구하고 나서야 큰 유화에 착수할 수 있듯이, 단문 연구를 충분히 하고 나서가 아니면 긴 글은 쓰지 못한다.
누군가의 흉내를 내자
누군가의 문체를 흉내 낸다고 하면, 자신의 경험 세부를 정직하게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될 문체의 소유자를 찾아내야 한다.
자신의 규범과의 거리가 가까우면 규범인 문체가 자신 내부에 들어올 때 당연히 그 문체의 소유자의 사고방식이나 시각도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시각과 하나로 혼연일체가 되어 녹아들어 버린다.
신문에서 작문에 관한 힌트를 얻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편리한 방법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문장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면 계속 신문 스타일을 흉내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신문의 글들은 난처한 경우를 피한 글이다. 뉴스는 사건 보도를 신문의 주요한 임무로 삼은 것으로, 정치적 주장을 생명으로 하지 않는다. 신문이 '상품'이라는 것이 되면 될 수 있는 한 많은 손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특정한 정치적 의견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즉, 어떤 의견을 강하게 주장해도 독자가 줄지 않는다는 안심이 없거나, 그 의견이 이미 사회의 대세가 되어버리지 않는 한 '사설'은 명확한 긍정이나 부정을 피하기 마련이다.
유행어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세간에서 환영받는 단어는 경계해야 한다.
좀 더 평범하고 요소적인 단어를 날카롭게 사용하는 것이 좋다.
어떤 사상가를 직접 골라 그 스타일의 모방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를 진지하게 해나간다면 마침내 모방할 가치 있는 저술가와 만나게 될 것이다.
'...만'을 경계하자
'만'이라는 접속조사는 어떤 문장이라도 편히 쓸 수 있으므로 편리하다. 그러나 문장 공부는 소중한 '만'을 경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만'은 극히 편리한 접속조사라서 이것을 빈번히 사용하면 누구든지 그다지 고생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
'만'이 좀 더 적고, 그 대신 '이기에'나 '그런 까닭에', '에도'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울퉁불퉁한 단어를 사용한 글 쪽이 후에 기억에 남기도 하고, 읽었을 때도 한 구 한 구 도망가지 않는다. 그러나 '만'으로 이어진 글은 자연스럽게 독자들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동시에 미끄러지듯 나가버리는 듯 하다.
많은 아군이 있는 회화체는 시각을 바꿔 생각해보자면 배후에 좋지 않은 조건이 붙어 있는 말과 같다. 문어체는 어디에도 아군이 없는 동시에 무척 자유롭다. 글을 쓸 경우 구체적인 인간이 상대를 해주지도 않으며 맞장구를 쳐주지도 않는다. 구체적인 상황을 상대방과 공유하는 일도 없기 때문에 이것에 기댈 수도 없고, 표정이나 몸짓도 도와주지 않는다. 즉, 대화에서 협력자가 해주는 역할 하나하나를 문자를 사용하여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
쓸데없이 격렬한 단어를 사용하면 단어가 상대방 마음 깊숙이 파고들어 가기 전에 폭발해버린다. 단어는 상대방 마음 깊숙이 조용히 들어가 그 이후에 폭발하는 편이 좋다. 폭발하는 것은 단어 그 자체가 아니라 단어에 담겨 있는 개념이므로, 단어는 신중한 것일수록 좋다. 이를 위해선 최대한 단순하고 조신한 단어, 약간 모자랄 정도로 약한 단어, 읽는 인간이 한껏 무리해서 보완해줄 것 같은 단어를 선택해야 한다.
논문이란 누구든지 읽을 수 있고 누구에게도 통용될 수 있도록 폭넓고 동시에 강한 설득력을 갖추어야 한다. 대화와 달리 글은 사교적이지 않다. 글은 인식이다. 따라서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 있는 애매한 표현은 피해야 한다.
일본어를 외국어로서 다루자
일본어로 글을 쓸 때는 일본어에 대한 익숙함을 버려야 한다.
글을 쓴다는 단계에 이르면 일본어를 분명히 객체로서 의식해야 한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외국어로서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외국어를 읽을 때는 사전과 문법에 의지해서 이치를 찾아가는 방법으로 문장을 읽어나간다. 따라서 외국어는 논리가 문법과 하나가 되어 그 기능을 하고 있다. 일본어를 쓸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자신이 수식을 조립하는 듯한 마음가짐으로 글을 써야 한다.
단어 선정에 오차가 발생하면 순식간에 그 존재에 오류가 발생한다. 막 쓰기 시작할 때 어떠한 단어를 사용할지, 그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단어 뒤 저편에 무엇이 있을지, 그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실물을 열심히 응시해야 한다. 단어 저 너머에 있기 때문에 실물을 보기 위해서는 단어를 통해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물은 단어 저 너머에 있으며, 우리는 단어를 통해서만 실물을 보기 때문에 그 단어가 우리의 눈을 빼앗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
겸허하고 투명하지 않으면, 너무 화려하고 번쩍거리면, 단어가 방해가 되어 우리는 실물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편이 좋다. 아름다운 단어를 택하는 편이 좋다. 그러나 우리들은 시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일본어를 객관화하지도 않고, 문법에 대한 의식도 없이 태만하게 모국어에 기대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모국어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무의식 상태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일본어를 자신의 외부에서 객관화하고 이것을 명료하게 의식화해야 한다. 글을 쓰는 인간은 일본어를 일종의 외국어로 신중히 다루는 편이 좋다.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을 그만두자
생각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쓴다는 것은 공간적 병존 상태에 있는 것을 시간적 계기 상태로 변환하여 집어넣는 일이다. 즉, 공간 속에 잡다하게 늘어서 있는 것을 하나하나 시간의 흐름 속으로 던져 넣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공간을 시간으로 고치는 것이다. 원래 아무런 시간적 순서도 없이 존재하고 있던 것들을 시간적 순서 속으로 보내는 것이니 만큼 A, B, C, D ...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어야 한다. 하나의 혼돈스러운 공간적 병존 상태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여 새로운 인위적 질서를 부여받을 때 거기서 새로운 현실이 태어난다.
전환 방식에 대한 특별한 고민 없이 그저 공간에서 시간으로 옮겨지면 읽는 사람은 금방 지루해져 버리고 내용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충분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깊게 안으로 들어가다보면 상호 극명하게 대립하는 것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 동안에는 쓰지 말아야 한다. 명료한 대립관계가 나타나게 되면 다른 한편에서 지금까지 비슷하게 보였던 많은 것들 사이에 미묘한 정도의 차이가 떠오르게 된다.
서론에서 자칫 글을 쓰는 사람은 긴장하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목적이나 요지를 꽤 상세히 써버리게 된다. 그것만으로 읽는 사람들은 상세한 청사진을 볼 수 있게 되지만 동시에 신선한 기분으로 내용을 접할 수 없게 된다. 무거운 서론을 피하고 오히려 스릴 넘치게 쓰기 시작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것은 한방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스릴 있게 시작한 글은 딱 끝나는 편이 좋다.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지금까지 말해왔던 이야기들을 요약해보거나 하는 것은 쓸데없다.
맨몸으로 공격해가자
달변가가 글을 쓰지 못하는 경우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글은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내야 한다. 여러 가지 사고방식을 가진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사항을 일일이 말에 의해 증명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2.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이것을 써낸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관념이 쌓여진 결과 발생한 하나의 폭발이다. 몇 년간이나 같은 주장을 계속해오고 있어도, 그때마다 자기 자신을 무리하게라도 폭발을 일으키기 쉽게 만들 새로운 각도를 찾기 위해서라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만 한다.
논문을 쓸 때 다음의 두 가지 점은 놓쳐서는 안 된다.
1. 해당 문제에 대해 이미 여러 학설이 있다. 주요한 학설은 필히 알아야 하며, 상호 비판되는 논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2. 사회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실질적인 문제가 있고, 그것에 대해 여러 세력이나 의견들이 싸우고 있다. 이러한 상황도 잘 파악해두어야 한다.
글을 쓸 때 우리들은 공격과 수비라는 두 가지 활동을 한다.
공격이란 자신의 의견이나 발언을 주장하는 측면이고, 수비란 자신의 의견이나 발언이 학설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단단히 설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글을 쓸 때 자신은 어디를 공격하고 있는가. 어디에 자신의 의견이나 발견이 있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인용구의 용도는 다음과 같다.
1. 사상의 소유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2. 출전을 명확히 해두면 자신이 엄청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3. 학문의 본점이 서양에 있다는 의식이 있으므로, 서양 문헌에서 인용하는 것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4. 권위 있다고 인정되는 학자나 사상가들로부터 인용하면 그 권위를 자신의 문장에 빌려올 수 있다.
5. 권위가 단순히 학문적이나 사상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 되면, 권위라고 하기보다는 권력에 가까운 병적인 것이 된다.
애석하게도 권위있는 단어는 종종 외국어이다. 외국어에는 일본어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신선한 느낌이 있다. 이 느낌은 외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본인에게만 존재하는 느낌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맨몸이 되어야 한다. 권위 있는 단어를 버린 후에 여전히 뭔가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승부하자. 모든 것을 버리고자 결심하면 글 안에서 공격할 부분이 명확해진다. 글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오히려 모든 것들을 버린 순간 글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 그 굵은 뼈대가 생겨난다. 굵은 뼈대가 완성되면 공부했던 성과가 이번에는 가는 뼈대나 자잘한 가시로서 도움을 준다. 공부 끝에 모든 것을 버리고 굵은 뼈대만 남겼을 때 사방에서 잔가시들이 도와주러 와주는 것이다.
문장에서도 무브망(Mouvement)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1. 무브망은 굵은 뼈대를 중심으로 존재해야 한다.
2. 글을 쓸 때 굴곡 있게 꿈틀거리면 단조롭지 않게 되어 변화가 발생한다.
3. 하나의 단어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사용하기보다 여러 가지 단어를 구사한다면 서술은 변화무쌍하고 화려해진다. 어휘는 풍부한 편이 좋으므로, 독서를 할 때 어휘를 채집하고 축적해두어야 한다.
4. 어휘가 지나치게 풍부한 것은 위험을 동반할 수 있으므로, 알고 있는 단어가 많더라도 신중하게 골라내야 한다.
5. 변화란 굵은 뼈대를 중심으로 하는 무브망에서 나오는 것이 진정한 변화다. 굵직한 논리적 굴곡이 중요하며, 자잘한 변화는 피하는 편이 좋다.
경험과 추상 사이를 왕복하자
일본에서의 서양어는 처음에 추상적 세계의 용어로서 수입 번역되었다가, 훗날 경험적 세계로 들어왔다. 바로 거기서 의미를 갈고 닦아 사용되며 우리들이 이에 익숙해짐에 따라 여러 가지 사물로 넓게 적용되었고 때로 남용되었다. 즉, 경험적 세계에서 살아온 단어는 '정의'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면서 추상적 세계로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게 된다.
많은 추상적 관념은 한자에 의해 표현된다. 서양 관념과 중국 한자와의 기묘한 결합을 통해 우리들의 근대사상은 비로소 출발했다. 학자가 자신의 학설을 말하는 경우에 자신의 견식을 나타내고자 이미 만들어진 흔한 단어를 사용하기를 기피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글자를 표현하고자 궁리했다. 이렇게 새로운 한자 조합이 경쟁적으로 행해졌다.
일본 철학 용어의 기초적인 것들은 '니시 아마네'에 의해 주조되었다.
그는 철학, 선천, 후천, 논리학, 심리학, 윤리학, 현상, 주관, 객관 등의 단어를 만들어냈다. 니시 아마네가 개척한 길에 따라 딱딱하고 어려운 학술용어 시스템이 시작되었고, 경험적 세계와 추상적 세계를 나눈 커다란 골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비로소 서양 관념을 일본의 단어로 포착할 수 있게 되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경험적 세계에 선 인간에게 설명하기 위해 추상적 세계만을 돌아다니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손이 닿지 않는다. 단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선 다시금 경험적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이렇게 경험과 추상 사이에서 빈번한 왕복 교통을 행하면 경험은 추상적 관념의 도움을 빌려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고도화할 수 있으며, 관념은 경험의 테스트를 거쳐 풍요로워지고 성장할 수 있다.
학생들이 읽는 교과서에는 추상적인 단어가 충분히 있지만 현재의 교육 방법 아래서는 학생 그 자신이 이 단어를 사용해서 실제로 표현활동을 여우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학생들은 수동적 자세로 단어를 읽고 쓰기만 하지, 강한 내적 긴장을 견디고 다량의 정신적 에너지를 방출하여 문장적 표현을 부여하는 기회가 극히 부족하다. 이렇게 서술적 표현을 할 기회가 없다면 교과서에 충만해 있는 추상적 관념은 학생들의 정신 깊이 각인될 일은 없다.
학교 교육을 위해 서적들이 완전히 갖춰져야 한다. 그리고 서양 여러 나라처럼 일상생활 용어에 정의를 부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추상적인 세계로 들어가도록 해야한다.
새로운 시대에 글을 잘 살리자
많은 외국어에서는 hs is...처럼 주어 다음에 동사가 나타나 문장 맨 처음에 글의 주역들이 다 나와버린다. 그러나 일본어의 경우에는 주어가 빈번하게 생략될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동사가 반드시 마지막에 온다. 대화라면 조건이 상당히 유리하긴 하지만, 일방적인 강연을 들을 때는 부단히 미결정 상태 속에서 초긴장 상태를 강요당하고 농락당하는 것이 된다.
대화에서의 말은 사교라는 조건 때문에 자유를 빼앗기지만, 한편으로는 상대방의 존재와 대응, 표정과 몸짓 등에서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회화체는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 있으므로 완전히 고독하기에 연설은 글에 가깝다. 요컨대 우리들은 '말하듯이 쓰는' 연습이 아니라, '쓰듯이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근본적인 룰로서는 마침표가 많은 문장을 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즉 짧은 문장을 계속 축적하는 편이 좋다. 하나의 짧은 문장으로 하나의 장면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접착력이 강한 접속사로 제대로 이어줘야 한다.
글을 쓰는데 필요한 에너지의 대부분은 이미지를 추상적인 말에 담아내고, 이미지를 상대방의 내부에 만들어내기 위해 소비된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처음부터 인간을 영상의 세계로 이끌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이미지를 만들 필요가 없다. 이처럼 텔레비전의 발전에 따라 읽는 것과 쓰는 것이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다.
오늘날 글은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이라는 유력한 경쟁자가 있는 장소에서 쓰이게 되었다. 논문과 같은 경우에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의 진보가 없었다고도 생각된다.
텔레비전 시대에 글은 영상이 될 것의 언어화라는 작업에서 해방되어, 영상이 될 수 없는 것에 온 힘을 쏟을 수 있다. 추상적 관념은 영상의 시대가 찾아와도 여전히 언어에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다. 또한 과거를 정복하고 현재를 정복한 텔레비전도 미래의 벽을 뚫을 수는 없다. 미래는 문장에 의해 파악되고 표현되어야 한다. 아무리 텔레비전이 발달해도 미래라는 것을 믿는 한 우리들은 앞으로도 글을 써가지 않으면 안 된다.
글은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단계, 유력한 경쟁자에게 둘러싸여지는 단계에 돌입하고 있다. 글의 본질은 추상적 언어로 이미지를 표현하고,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타인의 내부에 전하는 것이다.
글을 기계처럼 만들자.
글을 건축물처럼 다루자.
애매한 '만'을 경계하자.
굵은 뼈대를 잊지 않도록 하자.
경험과 추상 사이의 왕복 교통을 잊지 말자.
일본어 어순에 주의하자.
이러한 룰들을 거듭 반복하자.